위쪽으로의 추락, 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영화 《유로파 51》은 한 여성이 자기 세계를 버리고 타인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야기다.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1952년 발표한 이 영화의 주인공 이레네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겪은 뒤, 자신이 속했던 부르주아의 안락한 세계에서 이탈한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지만, 사회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그녀는 정신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어 감금된다. 감옥에 갇힌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평온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사회적 자유를 잃은 순간, 오히려 이전의 세계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된 것이다.
이레네의 삶은 시몬 베유가 사유한 ‘탈창조(decreation)’를 떠올리게 한다. 탈창조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의지를 내려놓고, 자신의 존재가 차지한 자리를 비워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일이다. 베유가 말한 ‘위쪽으로의 추락’ 역시 이러한 역설을 가리킨다. 물리적 중력 아래에서 추락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헌신하는 행위는 영적인 차원에서 상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비슷한 역설을 발견한다.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이념으로 죄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끝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그를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이끄는 인물은 매춘부 소냐다.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소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으로 라스콜니코프의 오만한 세계를 흔든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그가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인간이 비로소 타자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으로 읽힌다. 구원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던 태도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자신을 버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희생은 과연 기존의 계급질서를 전복하는가. 아니면 민중의 가난과 고통을 숭고한 구원의 무대로 바꾸어놓는 또 하나의 미학적 장치에 불과한가.
이레네의 헌신은 분명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기희생만으로 빈곤과 불평등을 만들어낸 사회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개인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계기로만 해석한다면, 민중은 다시 부르주아적 시선에 의해 재현되는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일과 고통을 생산하는 구조를 바꾸는 일은 서로 다르다. 이 차이를 지우는 순간, 희생의 미학은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김홍종 교수는 『시대 횡단. 안티-코나투스의 존재존』(문학동네, 2026)에서 안락한 세계에 대한 신뢰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 벗겨지면서 민중의 세계로 건너가는 변화를 ‘텅 빔의 부름’, ‘뜯겨져 나옴’이라는 표현으로 사유한다. 이 개념으로 《유로파 51》을 다시 읽으면, 이레네의 변화는 단순한 자선이나 도덕적 계몽이 아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를 기존의 삶으로부터 뜯겨 나오게 했고, 그 틈으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들뢰즈의 사유를 빌리면, 이는 고착된 정체성과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이동하는 탈주의 과정이다. 그러나 개인의 존재론적 변화가 곧바로 정치적 변혁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비우는 윤리적 결단이 사회구조를 바꾸는 실천과 만날 때 비로소 그 변화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설 수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위쪽으로의 추락’이라는 이미지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본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 영화에 감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의 가치는 작품이 전달하는 교훈에 동의하는 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작품을 통과한 뒤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데 있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과 만난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와 관계는 어떻게 흔들렸는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고통이 이제는 왜 눈에 들어오는가. 예술의 의미는 작품 안에 완결된 정답으로 존재하기보다, 감상자의 삶을 경유하며 새로운 질문으로 태어난다.
독자는 영화 이미지가 머무는 숙주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다. 화면에 새겨진 장면은 감상자의 신체와 정신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언어를 얻어 타자에게 건너간다. 글쓰기는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독점하는 일이 아니라, 작품을 통과하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찾는 일이다. 예술의 존재 가치는 바로 이러한 ‘전달가능성’에 있다.
AI 시대에 언어와 영상은 무한히 복제되고 변형된다. 무엇이 진실이며 어떤 이미지가 실제의 고통을 증언하는지 판단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미지가 넘쳐난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단 하나의 이미지라도 우리를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레네처럼 자신을 비우는 일이 언제나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냐의 사랑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자신을 지키고 높이는 일만이 삶의 목적은 아닌지,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은 누구의 고통 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리고 그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위쪽으로의 추락’이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높여온 기준에서 내려오는 일이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해온 타인의 고통을 더는 이전처럼 외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AI가 이미지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시대에도 인간의 윤리적 감응까지 자동으로 생성할 수는 없다. 예술은 그 감응의 가능성을 우리 앞에 다시 열어놓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추락하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하느냐는 것이다. [글=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국립국어원장-한국국어정책학회장-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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