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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가을 월류봉에서 당신의 존재 의의를 묻다...

  • 김한식 기자
  • 입력 2026.10.26 15:24
  • 글자크기설정

월류봉 1-1.jpg

 

감잎이 흐르는 길

 

            - 김한식 -

 

달도 쉬어 가는 월류봉에

 

제 자리를 지킨

 

정자 하나

 

우두커니 서서

 

아픈 시간을 건너간다

 

시냇물은

 

어디에서 왔는지

 

지난날을 말하지 않고

 

짝지어 놀던

 

원앙이

 

물가의 정적을 깨뜨린다

 

울퉁불퉁한 바위마다

 

상처로 새겨진 세월

 

굽이치는 석천 물길에도

 

끝내 건너지 못한

 

어둠이 있었으리라

 

반야(般若)로 가는 길은 멀고

 

구르며 부서지며

 

돌과 돌 사이를 이어 주는

 

석천 물길을 따라

 

새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돌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데크길을 걷는다

 

아뿔싸,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감잎 하나

 

부끄러운 듯 붉은 얼굴로

 

바람에 몸을 맡긴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어디로 가려는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조용히 묻는다

 

한 생을 살아낸다는 것은

 

저 붉은 잎처럼

 

마침내 자신을 비워

 

세상이 다시 흐르게 하는 일

 

그 길 끝에서

 

누군가의 가슴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줄기 바람일 수 있다면

 

<해설>  - 한 생이 바람에게 건네는 말 - 

 

김한식 시인의 「감잎이 흐르는 길」은 월류봉에서 반야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으며 자연의 풍경 속에서 인간의 생애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시입니다. 시인은 산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정자와 바위, 굽이쳐 흐르는 물길,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붉은 감잎을 통해 한 생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산길에서 시작된 사유는 마침내 인간이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닿습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월류봉의 정자는 오랜 시간을 견뎌 온 존재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달도 쉬어 간다는 아름다운 산자락에서 정자는 제자리를 지킨 채 아픈 시간을 건너갑니다. 움직이지 않는 정자와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냅니다. 하나는 머묾으로써, 다른 하나는 흘러감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견딥니다. 그러나 두 존재 모두 지나온 세월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 침묵 속에서 인간의 생애를 읽습니다.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말을 남겼느냐가 아니라, 말없이 견뎌 온 시간의 무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글=김한식] 

 

울퉁불퉁한 바위마다 새겨진 상처와 굽이치는 석천의 물길은 이러한 사유를 더욱 깊게 합니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돌은 부딪치며 깎이고 부서집니다. 그 과정에서 물길은 만들어지고 바위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습니다. 시인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물길에도 “끝내 건너지 못한 / 어둠이 있었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둠은 단순히 자연의 그늘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흐르는 물에도 건너지 못한 시간이 있고, 아무리 굳건한 존재도 피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을 극복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상처까지 품으며 깊어집니다.

 

시의 중심에는 ‘반야(般若)로 가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반야는 사물과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반야사로 향하는 산길은 단순한 여행의 경로를 넘어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한 내면의 여정으로 읽힙니다. 시인은 새소리와 바람 소리, 풍경 소리와 돌 구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의 소리들은 저마다 다른 울림을 지니지만, 그 모든 소리는 세계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생명의 숨결이기도 합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때 나뭇가지에서 감잎 하나가 떨어집니다. 이 작은 사건이 시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거대한 산과 바위,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정자와 물길을 지나온 시선이 마침내 한 장의 감잎에 머뭅니다. 시인은 감잎을 “부끄러운 듯 붉은 얼굴로”라고 표현합니다. 붉은빛에는 가을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한 생을 살아낸 존재의 겸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때 가지에 매달려 햇빛을 받던 푸른 잎은 이제 자신의 자리를 떠나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그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살아낸 존재가 자연의 더 큰 흐름으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 앞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에게 묻습니다.

 

“어디로 가려는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이 물음은 이 시의 사상적 중심입니다. 인간은 평생 어디론가 가려고 합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자신의 이름과 성취를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동안 정작 자신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돌아보지 못합니다. 지나간 상처와 미련, 소유에 대한 집착,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삶을 붙들기도 합니다. 시인은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을 삶의 무게를 묻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묻는 순간, 인생은 성취의 경쟁에서 존재를 성찰하는 여정으로 바뀝니다.

 

마지막 연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한 생의 의미에 대한 응답으로 나아갑니다. “한 생을 살아낸다는 것은 /저 붉은 잎처럼 /마침내 자신을 비워 /세상이 다시 흐르게 하는 일”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삶의 완성은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었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머물던 삶의 힘을 다른 존재와 세계로 돌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감잎이 가지를 떠나 바람에 몸을 맡기듯, 인간도 자신의 삶을 독점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때 더 큰 생명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세상을 다시 흐르게 한다는 역설은 인간의 존엄을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관계와 나눔에서 찾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한 생을 살아낸 인간의 윤리적 책임으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왔으며, 우리가 남긴 말과 행동은 다른 이의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는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오래 남기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누군가의 삶이 조금 더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한 줄기 바람”은 그러한 삶의 모습을 압축합니다. 바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세상 곳곳에 닿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지만 그 흔적은 누군가의 마음에 남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가슴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에는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을 넘어선 겸허함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이 걷는 길은 초강천 끝자락에서 석천 물길을 따라 반야사에 이르는 길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깨닫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서 시인은 조용하지만 묵직한 삶의 지혜를 건넵니다. 한 생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이해하고, 그 시간의 결실을 다른 존재와 나눌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됩니다. [시-글=김한식]

 

김한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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