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정치 풍경
얼마 전 광주에서 방언문학 잔치에 방언문학이 왜 호명되는지에 대한 특강을 하였다. 모어의 생명 연장을 위해 문인들이 협력해야 한다. 신선한 모어 조어 생산을 위해.
서울시와 부산시가 지나친 외국음차표기 오용문제로 한글문화 단체로부터 도마 위에 올려졌다. 언어정책의 정치적 비판의 상징적 풍경이라고나 할까? 실은 언론의 인기몰이 연예물에서 우리 말과 글의 혼란한 모습을 보면 국가의 언어 정책이 있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현대 언어 연구자의 절대 주류 학자들이 서구의 문법 이론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편협한 시각에 맞춰 “표준국어”라는 모형에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한국어라는 다양한 방언들은 절멸로 내밀쳐지고 왜곡된 구문구조의 고착화와 서구 외래어음차표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여기에다가 두음으로 조형된 약어들이 우리 모어의 기반을 완전 밀쳐낸 지경이다.
인간진화생물학자 조지프 헨릭은 《위어드》에서 "서구W의 교육E수준이 높고 산업화I된 부유R하고 민주적D인 사람들"을 '위어드WEIRD'라는 약어로 표현하며 이들이 영어 낱말 '위어드 weird' 의 뜻 그대로 기이하고 유별나다고 말한다. 위어드에 속한연구자들이 말하는 언어 보편성은 실은 위어드 언어의 특징에 불과했다 초기 언어학은 인류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조선어학회의 주인공들 역시 서구중심주의와 식민주의 기획에서 자유롭지 못했듯 언어학 또한 그 한계에 갇혀 있었다. 서구문법 체계에서 발아한 조선어문법, 한국어문법은 다시 문화어와 표준화라는 국가주의의 목표 아래 가둬지면서 모국어의 다양성은 서멀서멀 무너져 왔다.
생물 진화에서 다양성이 핵심이듯 언어도 다양성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친족어, 색채어, 냄새를 일컫는 낱말 등은 언어마다 무척 다양하다. 특히 한국어에서 의성어와 의태어는 비자의적 결합의 대표적 사례이지만 에버렛은 ‘음지각소'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소리와 의미의 연관성을 훨씬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버렛은 “언어가 세계를 간각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언어 습득과정에서 상징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어의 구어 실태를 들여다보면 심각한 상황이다. 토씨를 제외한 낱말들은 정체불명의 외국음차 부호들이 가득 차 부풀러 오른 모습이다.
표준어로 구성된 표준국어사전의 외연에 밀려난 낱말 뿐만 아니라 표준문법 중심의 문법 언어관 대신 구문문법이라는 새로운 언어관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학습할 때 낱말과 문법을 따로따로 외우는 게 아니라 온갖 구문(구문문법에 따르면 낱말도 구문의 일종이다)을 암기해뒀다가 그때그때 적절한 구문을 꺼내 쓴다는 것이다.
AI가 사전-문법 언어관보다 구문문법 언어관에 기반한 자연어 처리에 따라 엠비딩처리 기술력이 고도화되면서 낱말을 문법에 따라 배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현재 인공지능 번역을 주도하는 거대언어 모형은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대규모 말뭉치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구문문법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더 정확한 관점이라면 지금의 인공지능연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언어 다양성이 입증되고 인간 언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인공지능을 통해 검증되고 있는 지금 언어는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대 종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도 시시각각 감소하고 있다. 언론매체나 SNS 등에서 소통되는 언어의 혼태(뒤썪임), 단축, 두문자결합 등 언어 체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건강한 언어 다양성이 사라지면 진화가 중단되고 퇴보가 시작되면서 언어 소멸 못지않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체불명의 언어의 획일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어의 생산자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극소수의 방송매체나 인공지능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말과 글을 배출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언어가 빅데이터에 포함되어 언어 학습에 쓰이면서 언어가 닫힌계로 바뀌고 있다. 닫힌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즉 언어는 점점 무질서해질 것이다.
언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예지에 넘친 상상하는 몸을 가진 인간이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언어를 발전시키며 살아온 인간만이 언어의 획일화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상력을 가진 인간이 언어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게임에 빠져있다. 정부와 언론 지방 자치 조직들마져 모국어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에 전혀 어긋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어는 국립국어원에서 제정한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국어 어문 규정을 가진 매우 일관된 언어다.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같은 생각을 같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효율적 검색을 위해서도 언어의 표준화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표준화'는 왠지 '화석화'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낡은 낱말의 화석으로 진부하게 생각하면서 별별 기이한 말 만들기를 하고 있다.
변화에는 반드시 다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죽었다'라고 말한다. 한국어가 더 다양해지길,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살아남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한국어 정책 기관이 이처럼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새로운 지속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성이 보장된 한국어생태지수를 꼼꼼히 점검해야 할 상황이다.
필자 이상규 박사
국내 최고의 국어국문학자. 국립국어원 7대 원장과 국어정책학회 회장,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로 고향 대구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 작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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