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후보 케이코 후지모리, 좌파 후보 로베르토 산체스 - 페루 대통령 후보)
나라가 둘로 갈라질 때-페루 대선이 던지는 질문
2026년 6월 7일, 페루(Peru)에서 대통령 선거 2차 투표가 열렸다.
페루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에 위치한 인구 3,300만의 나라다. 잉카 문명의 후예들이 살던 땅이고, 16세기 스페인 식민지배를 거쳐 1821년 독립했다. 수도는 리마(Lima), 태평양 연안의 현대 도시다. 한국과는 2011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페루 입장에서 한국은 6위 교역 파트너다. 매년 30억 달러 이상을 교역하며, 구리, 천연가스, 아연 등 한국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을 돌리는 핵심 원자재가 이 땅에서 온다. 중남미에서 브라질, 칠레와 함께 한국의 핵심 경제 파트너다. 정치가 불안해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한다. 그래서 페루의 정치 변화는 한국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권자 2,732만 명. 그 중 1,871만 명이 투표했다. 참여율 68.5%.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가 대통령인지 모른다.
개표율 95.7%, 두 후보 격차는 2만6천 표. 50.08% 대 49.92%다. 이 초박빙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나라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다는 증거다. 공식 당선자 선포는 취임일인 7월 28일 직전에나 가능하다. 새 대통령이 누군지, 임기 시작 직전까지 모른다. 그것도 페루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페루의 서울, 리마(Lima)와 지방
페루를 이해하려면 먼저 잉카 제국을 알아야 한다. 잉카는 15세기에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린 대제국이었다. 그들이 남긴 가장 놀라운 유산은 황금이 아니라 도로였다. 카팍 냔(Qhapaq Ñan), 케추아어로 '왕도(王道)'라는 뜻의 이 도로망은 총 길이 4만km에 달했다. 해안 도로만 4,000km, 안데스 산맥 도로 5,200km. 7.2km마다 거리 표지가 있었고, 차스키(chasqui)라 불리는 전령들이 교대로 달리며 물자와 정보를 제국 끝까지 실어날랐다.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이틀 안에 수도 쿠스코(Cusco) 황제의 식탁에 올랐다는 기록이 스페인 연대기에 남아 있다. 바퀴도 없고 현대 도로도 없던 시대였다. 수도와 변방이 하나로 연결된 제국이었다.
그 통합의 질서를 스페인이 파괴했다. 1533년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잉카를 멸망시킨 뒤, 도로는 방치됐고 제국의 행정 체계는 해체됐다. 대신 스페인은 리마를 태평양 교역의 거점으로 키웠다. 모든 자원과 권력이 리마로 집중됐다. 안데스와 아마존은 착취의 대상이 됐다. 그 구조가 독립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는 그 균열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마 인구는 1,100만, 전체 국민의 3분의 1이다. 반면 안데스(Andes) 산골과 아마존(Amazonas) 오지에는 스페인어보다 케추아어를 쓰는 원주민 후손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 리마와 지방, 이 두 페루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나라처럼 살아왔다.
좌파 후보 로베르토 산체스(Roberto Sánchez)를 이해하려면 페드로 카스티요(Pedro Castillo)를 먼저 알아야 한다. 카스티요는 2021년 안데스 산골 출신 시골 교사로 대통령이 됐다. 페루 역사상 가장 가난한 배경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부패 의혹과 의회 해산 시도로 탄핵됐고, 지금은 수감 중이다. 산체스는 그 유산의 계승자다. 리마 엘리트들이 오랫동안 외면해온 페루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반대편의 게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는 이번이 네 번째 대권 도전이다.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Alberto Fujimori)는 1990년대 페루를 통치한 독재자였다. 좌파 게릴라를 소탕하고 시장경제 기틀을 닦았다. 리마의 엘리트들이 기억하는 후지모리는 거기까지다.
그러나 같은 시기, 후지모리 정부는 안데스 농촌의 원주민 여성 27만 명에게 강제 불임 시술을 했다. 논리는 단순했다. 가난한 사람이 아이를 낳으니 나라가 가난하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의 몸에 칼을 댄다. 빈곤의 구조는 건드리지 않고. 국가가 연간 할당량을 정해 집행한 이 인권 범죄에서 18명이 사망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24년 이를 반인도적 범죄로 공식 판정했다. 피해 여성들은 의료진이 칼을 갈면서 동물처럼 잘랐다고 증언했다.
리마의 엘리트들에게 후지모리 가문은 여전히 '질서의 상징'이다. 안데스 산골의 피해 여성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다. 이것이 선택적 망각이다.
두 후보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지자들이 상대를 '좋아서'가 아니라 '더 싫어서' 투표했다는 것.
10년에 대통령 여덟 명
2016년 이후 페루는 대통령을 일곱 명 갈아치웠다. 쿠친스키(Kuczynski)는 부패로 사임했고, 비스카라(Vizcarra)는 탄핵됐고, 메리노(Merino)는 시위에 밀려 취임 닷새 만에 물러났다. 카스티요(Castillo)는 수감됐고, 볼루아르테(Boluarte)는 시위 속에 버티다 탄핵됐다. 헤리(Jeri)는 불과 넉 달 만에 해임됐다.
지금 페루 대통령은 호세 마리아 발카사르(José María Balcázar)다. 국민이 직접 뽑은 게 아니다. 헤리가 해임된 뒤 의회가 선출한 과도 대통령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당 페루 리브레(Perú Libre) 소속이며, 올해 83세로 페루 역대 최고령 취임 대통령이다. 7월 28일 새 대통령에게 권한을 넘긴다. 잉카 도로를 무너뜨린 스페인이 남긴 불안정한 권력 구조가 200년 후에도 이런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
(페루 국회의사당)
의회 상황은 더 복잡하다. 페루는 이번에 1990년 이후 처음으로 상하 양원제를 복원했다. 새 의회는 상원 60석, 하원 130석, 총 190석이다. 하원에서 후지모리의 푸에르사 포풀라르(Fuerza Popular, 우파)가 41석으로 1당, 산체스의 훈토스 포르 엘 페루(Juntos por el Perú, 좌파)가 31석으로 2당이다. 상원에서는 각각 22석과 14석. 어느 당도 과반이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인수위도 없이 바로 취임해야 한다. 의회 과반도 없다. 취임 첫날부터 극단적 대립이 기다리고 있다. 페루 정치의 만성 질환이 또 한 번 반복될 준비가 돼 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위기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다. 리마와 지방의 극단적 빈부 격차. 신분 고착화. 그 사이에서 중산층이 서서히 사라졌다. 중산층이 얇아지면 중도 정치의 토양도 함께 메마른다.
칼이 칼집이 되면...
페루 헌법 제113조 2항에는 incapacidad moral permanente(영구적 도덕 무능력)라는 조항이 있다. 의회가 대통령을 '도덕적으로 무능하다'고 판단하면 해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준은 모호하다. '도덕적 무능'이 무엇인지 헌법 어디에도 정의가 없다. 이 조항의 기원은 1839년, 독립 후 18년 만에 만들어진 헌법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했지만 법의 DNA는 식민지 시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모호한 조항은 200년 가까이 정적 제거의 도구로 쓰여왔다.
이웃나라 콜롬비아(Colombia)도 다르지 않았다. 1991년 이전까지 콜롬비아 헌법 첫 문장은 "모든 권위의 최고 원천인 하나님의 이름으로"였다. 가톨릭이 국가 종교였고, 결혼과 교육까지 교회가 관할했다. 각 지역의 신부는 사실상 정치권력자였다. 독립 후에도 스페인이 심어놓은 교회-국가 결합 구조는 헌법 조문 속에 살아남았다. 1991년 새 헌법이 제정되면서야 비로소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가 명문화됐다.
페루의 incapacidad moral permanente와 콜롬비아의 가톨릭 국교 조항. 둘 다 식민지 법의 DNA가 독립 헌법 안에서 200년을 버텨온 증거다. 형식은 공화국이었지만 내용은 봉건이었다.
로마법에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Nemo iudex in causa sua —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동시에 법의 심판을 받는 당사자가 되면, 정의는 무너진다는 것을.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이 원리를 『법의 정신』에서 체계화했다. 입법, 행정, 사법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게 하라. 권력이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 공화국의 기초, 삼권분립의 정신이다.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는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그 사법부 역시 권력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어디서든 부패한다. 사법부라고 예외가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동네를 나누는 벽)
페루는 그 원칙이 무너진 나라다. 의회는 incapacidad moral permanente라는 모호한 조항으로 대통령을 갈아치웠다. 법원은 권력의 눈치를 봤다. 검사는 정치인이 됐다. 제도가 제도를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시민은 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여덟 번 바꿔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 선거에 가지 않는 것이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는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이 극단을 키우는 토양이 된다. Autoridad paternal(아버지 같은 권위자)에 대한 기대는 그 냉소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것을 단칼에 해결해 줄 강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것. 그 기대가 반복될수록 민주주의의 뿌리는 얕아진다.
칼이 칼집이 될 때, 우리는 칼집이라는 이름의 칼 앞에 서 있다.
'중남미화'가 경고하는 것
한국에서 '중남미화'는 오래된 두려움이다. 빈부 격차 심화, 계층 사다리의 붕괴, 정치의 극단화. 그런데 이 경고의 뿌리를 더 깊이 파고들면,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스페인이 중남미에 남긴 것은 도로가 아니었다. 잉카의 카팍 냔은 파괴됐고, 대신 아시엔다(Hacienda), 즉 대농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아시엔다의 주인들이 지금도 리마의 언론을 쥐고 있다. 스페인 식민지배는 유럽 중세의 가톨릭 권위주의와 봉건적 토지집중을 그대로 이식했다. 민중은 제도를 통한 변화보다 '모든 걸 해결해 줄 강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것이 포퓰리즘과 독재가 반복되는 구조적 이유다. 지금 페루의 혼란은 그 봉건 구조가 흔들리는 산고다. 교회, 기성언론, 토지 과두 세력의 정당성이 무너지고 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새 질서는 아직 없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과 관료적 통치 구조를 이식했다. 해방 후 그 물질적 토대 - 토지, 자본, 관료 네트워크 - 를 승계한 세력이 권위주의 정권의 사회적 기반이 됐다. 식민 유산이 권위주의의 토양을 먼저 만들었고, 그 위에 공화국을 세우는 싸움이 시작됐다.
한국 임시정부가 공화국을 선언한 것은 1919년이다. 그러나 실질적 공화국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짧다. 지금 한국이 겪는 정치 갈등을 단순히 좌우 대결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그것은 공화국 정체성 자체에 대한 시험이다. 제도가 권위를 이길 수 있는가. 법이 권력보다 강할 수 있는가. 페루가 200년째 묻고 있는 질문을 한국도 지금 묻고 있다.
중도는 그 질문 앞에 서는 자리다!
중도란 입장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한 자리다. 봉건 유산이 남긴 극단의 유혹 - 강한 지도자에 대한 기대, 적을 향한 분노 - 을 거부하고, 제도와 타협의 언어로 싸우는 것. 양쪽을 동시에 불편하게 만들고, 어느 편의 박수도 기대할 수 없는 자리.
그래서 중도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페루의 비극은 그 자리가 이미 사라진 데 있다. 한국은 아직 그 자리가 남아 있다.
그 자리를 지키는 일. 지금 가장 절실한 정치적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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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양삼일 아시아이베로문화재안 이사장은 콜롬비아 로스안데스 대학교(Universidad de los Andes)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30년 가까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한국과 중남미를 잇는 문화공공외교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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