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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칠흑같은 밤에 새벽을 여는 할머니..

  • 김한식 시인 기자
  • 입력 2026.06.0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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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1-1.jpeg

 

해 뜨는 아침

 

  - 김한식 시인 -

 

두 손으로 꼭 쥐어 짠 행주로

 

닦고 또 닦아서

 

가지런히 말아 놓은

 

고운 자리에

 

어쩌다가

 

마알간 정화수 한 사발이

 

놓일 때에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기도소리가 들린다

 

시절을 탓할 수밖에

 

조국의 산하에 꽃으로 진

 

세 아들,

 

한 평생 가슴에 묻고

 

가슴은 터져서

 

억장으로 무너져도

 

안으로 안으로 옹그시던

 

그 성스러운 모습,

 

떠오르는 고운 해 되어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맑은 사람 되라고

 

가슴으로

 

가슴으로만 빌던

 

할머니의 기원

 

이제

 

해뜨는 아침이면

 

금방 행구워 낸 햇살로

 

나도 맑은 사람되어

 

고운 자리 앞에 다소곳이 앉아

 

손 비비는 할머님께 다가서고 싶다

 

할머니 2-1.jpeg

 

- 해설 -

전쟁은 한 시대를 파괴하지만, 그 파괴의 잔해는 언제나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오래 남습니다. 김한식 시인의 「해 뜨는 아침」은 6·25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정면에서 호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비극이 한 가정의 새벽 풍경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일상이 되었는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시에서 전쟁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며, 기억이 아니라 반복되는 몸의 동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두 손으로 꼭 짜낸 행주로 자리를 “닦고 또 닦는" 할머니의 모습을 마주합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정결의 몸짓이 아니라,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시간을 견뎌온 삶의 형식으로 읽힙니다. 이어지는 정화수 한 사발은 민간신앙의 도구이기 이전에, 말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상실을 대신해 올려진 침묵의 언어입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세 아들을 잃은 고통은 매일 새벽 다시 시작됩니다.

 

“조국의 산하에 꽃으로 진 세 아들”이라는 표현은 전사자의 죽음을 미화하려는 관습적 수사가 아닙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가슴은 터져서 억장으로 무너져도”라는 구절은, 그 상실이 결코 상징으로 정리될 수 없는 실존의 무게임을 단호하게 드러냅니다. 이 시에서 ‘세’라는 숫자는 셈의 단위가 아니라, 한 인간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중량입니다. 할머니는 그 무게를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옹그시던"으로 접어 넣습니다. 이 침묵은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성스러운 절제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 문학의 다른 계보와 나란히 놓일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전쟁은 청년들의 몸과 정신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며, 그 파괴는 냉정한 문체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레마르크의 인물들은 살아남지만, 전쟁 이전의 세계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자각합니다. 그의 문학은 전쟁이 인간의 미래를 어떻게 삭제하는지를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파울 첼란의 시에 이르면, 언어 자체가 이미 전쟁 이후의 세계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푸가」에서 반복과 단절로 이루어진 문장은, 홀로코스트 이후 말한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줍니다. 첼란에게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언어가 붕괴된 결과입니다. 말은 더 이상 구원하지 못하고, 다만 절망의 심연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김한식 시인의 시에서 침묵은 다른 성격을 띱니다. 이 침묵은 언어의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감내한 윤리적 태도입니다. 할머니는 하늘에 정의를 요구하지도, 전쟁의 책임을 묻지도 않습니다. 다만 떠오르는 해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맑은 사람”이 되기를 빌 뿐입니다. 이 기도는 죽은 이를 위한 애도가 아니라, 살아갈 이를 위한 기원입니다.

 

이 지점에서 「해 뜨는 아침」은 전쟁 극복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극복은 분노의 해소나 상처의 제거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끌어안은 채, 그 상처가 다음 세대를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가 “나도 맑은 사람되어” 할머니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할 때,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윤리의 계승 선언입니다. 전쟁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고통을 어떤 삶의 태도로 전환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납니다.

 

결국 이 시는 전쟁의 비극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전쟁이 인간에게서 끝내 빼앗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매일의 정갈함, 말없는 기도, 그리고 다음 사람을 향한 희망. 해는 그렇게 떠오르고, 정화수는 다시 맑아지며, 한 인간의 삶은 조용히 바로 세워집니다. 「해 뜨는 아침」은 거대한 비명의 문학들 사이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가장 오래 남는 울림을 건네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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