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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양삼일] 70년째 반복되는 눈물: 해외 참전용사와 기억의 소비

  • 콜롬비아=양삼일 기자
  • 입력 2026.06.1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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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양삼일] 70년째 반복되는 눈물: 해외 참전용사와 기억의 소비

 

매년 6월이면 찾아오는 익숙한 기사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현충일 무렵이면 한국 언론에는 해외 참전용사들의 삶을 다룬 기사들이 등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병했던 콜롬비아를 비롯해 에티오피아, 태국, 필리핀 등 여러 나라의 참전용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노후를 보내고 있는지를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기사 속에는 늘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한다. 병든 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노병,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고통받는 참전용사, 그리고 그 후손들의 어려운 삶이 독자의 눈길을 끈다.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묘한 아쉬움도 남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년 비슷한 기사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참전용사들의 어려운 삶은 해마다 6월이 되면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사람들은 감동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성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6월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관심도 함께 사라진다. 다음 해가 되면 우리는 다시 비슷한 기사와 비슷한 사연을 만나고, 다시 안타까워한다.

물론 이러한 기사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군가는 이들의 삶을 기록해야 하고, 누군가는 잊혀진 희생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는 것일까. 왜 해외 참전용사들의 삶은 늘 안타까운 기사로만 등장하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가난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런 삶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이토록 더딘 걸까.

나는 이번에 또 하나의 기사를 읽으며 문득 오래전 읽었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르포가 떠올랐다. 7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언론에 비쳐진 사람들의 사정은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참전용사들의 가난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가난이 70년 동안 반복되어 왔음에도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고, 같은 방식으로 감동하고, 같은 방식으로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1954년에도, 그리고 오늘도...

 

1954년, 스물일곱 살의 젊은 기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의 삶을 취재했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그는 당시 '엘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귀환 병사들이 마주한 현실을 세 편의 르포 기사로 기록했다.

(노벨 문학상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54. 12월  한국전 참전 관련 기사)

그가 만난 사람들은 전쟁 영웅이라 불리던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웅의 삶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어떤 이는 사회의 편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심지어 생계를 위해 자신이 받은 훈장을 전당포에 맡겨야 했던 병사도 있었다.

마르께스는 그들의 현실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그 기사 속에는 오늘 읽어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이 있다.

"Veteranos de guerra, víctimas de la paz."

(전쟁의 참전용사들, 평화의 희생자들.)

"No me mataron en Corea y me matan en Bogotá."

(나는 한국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보고타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말은 총탄에 맞아 죽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이 한 문장은 한국전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이후 국가가 참전용사들을 어떻게 기억했는가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가난과 실업, 그리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삶을 의미했다.

70년이 지난 오늘, 이 이야기는 여전히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읽고 있는 기사들 속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4년 마르께스가 기록한 이야기는 2000년에도 반복되었고, 2026년 한국 언론에서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늙었고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자녀들도 노년이 되었으며, 어떤 가정에서는 이미 손자녀 세대가 그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사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린다. 여전히 안타까워한다. 여전히 성금을 모은다. 그리고 다시 잊는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참전용사들이 가난한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이미 1954년 마르께스가 던졌다.

오늘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70년 동안 같은 질문만 반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 우리는 매년 6월이면 해외 참전용사들의 어려운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눈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가.

어쩌면 문제는 참전용사들의 가난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 가난이 70년 동안 반복되어 왔음에도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고, 같은 방식으로 감동하고, 같은 방식으로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한국으로 왔는가

 

오늘날 우리는 해외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이야기할 때 종종 자유를 위한 숭고한 헌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분명 사실의 한 부분이다. 낯선 나라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조국도 아닌 곳에서 싸웠다는 사실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콜롬비아 병사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1950년대 콜롬비아가 어떤 나라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콜롬비아는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라고 불리는 내전의 한복판에 있었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충돌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농촌 마을이 폭력 속에 휩쓸렸다. 오늘날 콜롬비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무장갈등의 뿌리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대통령 라우레아노 고메스(Laureano Gómez)는 단순한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내내 자신이 창간한 신문 엘 시글로(El Siglo)를 통해 나치즘과 파시즘을 공개적으로 찬양했고, 스페인 프랑코 독재 체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연합국이 독일에 맞서 싸우던 시절, 그는 나치 잠수함이 콜롬비아 선박을 격침한 사건조차 미국의 도발 탓으로 돌리며 히틀러 편을 들었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고메스는 외교적 고립 위기에 처했다. 한국전 파병은 그에게 선택이 아니라 탈출구였다. 나치 협력자라는 과거를 지우고 미국의 신임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냉전 질서 속에서 콜롬비아의 위치를 새로 정하려 했다.

물론 당시 병사들이 이런 국제정치적 계산을 이해하고 전쟁터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한국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농촌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가족의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폭력과 가난으로 가득했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러한 이유들이 뒤섞이며 수천 명의 젊은 콜롬비아인들이 한국행 배에 올랐다.

1954년 마르께스가 만난 귀환 병사들의 증언 속에서도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웅이 되고 싶어서라기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귀국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전 참전이라는 사건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정부에게는 정부의 이유가 있었고, 국제정치는 국제정치의 논리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향한 젊은 병사들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냉전의 전략보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였다.

국가는 냉전의 승리와 외교적 성과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많은 병사들은 다시 가난한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같은 전쟁, 다른 삶

그러나 한국전 참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자주 놓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흔히 참전용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기억한다. 모두가 같은 전쟁터에서 싸웠고 같은 희생을 감당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삶까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뒤부터 참전용사들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시 콜롬비아 보병대대의 장교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고타의 중산층 이상 가정이나 사회적 기반을 가진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 군과 정부, 정치권의 주요 위치로 진출했고, 한국전 참전 경력은 사회적 자산이 되었다. 훈장과 명예는 그들의 경력과 함께 기억되었고, 후손들 역시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많은 사병들의 삶은 달랐다.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농촌 출신의 가난한 청년들이었고, 내전과 빈곤 속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군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장교와 같은 총탄을 맞았지만, 귀국 후에는 전혀 다른 출발선 위에 놓였다.

전쟁의 상처는 남아 있었고, 교육의 기회는 제한적이었으며, 사회안전망은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부상과 질병을 안고 살아야 했고, 어떤 이는 전쟁의 기억 속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던 셈이다.

오늘날 한국 언론이 만나는 가난한 참전용사들과 후손들 역시 대부분 이 계층에 속한다.

우리가 기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장군의 손자가 아니다.

농민의 아들이었고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한국행 배에 올랐던 젊은 병사들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가난을 단순히 개인의 실패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과 사회구조가 함께 남긴 결과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난은 자녀에게 이어졌고, 다시 손자녀 세대로 이어졌다. 국가가 충분히 책임지지 못한 전쟁의 비용이 가족 안에서 세대를 건너 전해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해외 참전용사 후손들에 대한 지원을 단순한 시혜나 동정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문제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은 참전용사의 빈곤이 아니라, 전쟁 이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부채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긴 것...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 남긴 가장 묵직한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된다.

많은 병사들은 가난과 폭력 속에서 한국으로 왔다. 각국 정부는 저마다의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필요 속에서 파병을 결정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적지 않은 병사들은 충분한 보상과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흘린 피는 대한민국 외교의 중요한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인천상륙작전과 휴전협정, 그리고 한미동맹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나라였다.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던 그 시절, 콜롬비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참전은 단순한 군사적 지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특히 콜롬비아는 중남미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였다. 한국전쟁이라는 특별한 경험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양국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콜롬비아에서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공식 행사와 문화교류 현장, 대학 강연과 외교 행사에 참석해 왔다. 그 과정에서 놀라웠던 것은 한국전 참전의 기억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오래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참전용사들이 참석하는 행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방 도시의 공무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대학 관계자들과 협력 사업을 논의할 때도, 한국을 처음 접하는 시민들과 만날 때도 종종 한국전쟁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 아버지가 한국에 다녀 왔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습니다."

"콜롬비아는 한국과 피를 나눈 나라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양국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한국과 콜롬비아 관계가 오직 한국전 참전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경제협력도 있었고, 교육과 문화교류도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병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양국 관계 역시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가난한 사병들의 희생과 눈물 위에서 대한민국 외교의 중요한 토대 가운데 하나가 만들어진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동정이 아니라 책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나는 해외 참전용사 문제를 바라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진 빚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종류의 빚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세종학당을 통한 한국어 교육, 유학 연계, 민간 협력 같은 방안들은 지금 후손들에게도 현실적으로 열려 있는 길이다.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의 예산을 보조하는 방식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실질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다르게 돌아간다. 한국 언론이 어렵게 찾아낸 후손의 이야기는 기사가 되고, 잠깐 세상을 감동시킨다. 마치 3월이면 독립운동가 후손의 어려운 사정이, 8월이면 광복절 즈음 또 다른 사연이 지면을 채우듯이.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 모두 너무 잘 안다. 6월이 지나면 잊힌다. 내년에 또 다른 기사가 또 다른 후손을 찾아낼 때까지.

이것이 70년째 반복되는 구조다. 감사함을 잊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게 이것은 위대한 서사다. 낯선 땅에서 피를 나눈 우방, 잊지 않는 나라. 그러나 콜롬비아 입장에서 70년 전 한국전은 지금 이 순간의 급박한 현실 앞에서 멀리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콜롬비아 보훈처는 지금도 내전으로 쓰러진 군경 사망자와 그 가족들, 부상자들의 급한 불을 끄기에도 벅차다. 내년에도 피해자가 생길 것이고, 그다음 해에도 그럴 것이다. 그 현실 앞에서 외국 정부가 70년 전 참전용사의 손자녀를 챙기겠다고 나설 때, 콜롬비아 당국이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일지 부담으로 느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콜롬비아가 자국민에게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이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보훈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독립운동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았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었고, 남겨진 가족들은 재산을 잃고 생계를 포기한 채 살아야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 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보훈의 손길이 모든 후손에게 충분히 닿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한국이 콜롬비아 참전용사 후손 문제까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있는 길을 조용히 넓혀두는 일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매년 6월 한 번의 눈물로 소비하는 데서 멈추는 것.

 

1954년 마르께스가 기록했던 이야기와 오늘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이야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먼저 그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기억을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기억이 더 이상 눈물로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해외 참전용사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예우일 것이다. [콜롬비아=양삼일 아시아이베로문화재단 이사장, 세종학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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