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속의 풍경화
소설가 이문열의 “시인”을 다시 읽어본다. 김삿갓 김병연의 유랑 시인의 삶, 정격에서 일탈한 풍자와 비유로 촌철살인의 시학의 미를 뿜어낸 그의 일대기에 속하는 소설이다. 홍경래 난에 연루되어 풍지박산이 난 사대부가의 몰락과 사회계급이 무너지는 혼탁한 시대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사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양반 사대부가의 몰락은 하충계급의 일탈과 함께 소위 선비라고 고고한 사회지도 계급이 와해되어 가는 꼴이 오늘날 소위 문화예술인들이 선거바람에 휩싸여 권력에 굽신거리며 고물이라도 한 점 얻어걸릴려는 하이에나의 비굴한 눈길을 마주치기 부지기 수이다.
권력이 광기를 발하는 낡은 정치제도의 상징이 선거로 표상된다. 문화 예술의 집단들이 무언가 아쉬운 걸 도움받으러 자주 정치 권력의 주변을 찾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예술이 관변의 지원단체로 전락했다는 증거이다.
조선 말, 몰락한 사대부가 제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주변 토착 부자들로부터 설움 받고 괄시당하는 기회가 잦게 되었다.먹고 살기 위해 초라한 몰골인 훈장으로 나선 양반들이 부지기 수로 늘었다. 일가를 이룬 김삿갓 시詩도 당대에 초라해진 훈장들에 대한 경멸의 시가 적지 않다. 연암의 소설 “호질”에서 곤두박질치는 선비의 추락한 모습처럼 기울어진 사회적 풍자 대상으로 선비가 떠 올랐 듯이.요사이 시인들은 제마다 동네방네 시인학교를 열어 문하생을 양육하며 입벌이를 하는 품새가 너무나 흡사하다. 김병연은 자신의 시에서 읽어낸 것은 소위 추락한 서당의 훈장들의 얕은 배움과 가벼운 지적 재주, 그리고 낮은 인간 자질의 세태였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향교와 유림집단들이 득세하고 있으나 과연 그들 가운데 한문 원적을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유림이 몇이나 될까? 공직이나 학당에서 은퇴한 무리들이 유림 기관을 거점으로 지배구조를 만들어 짝퉁 유학팔이 행세를 하고 있다. 또 선거판에 유림회관 건립을 선거공약으로 내걸며 선거 뒷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언제나 한적 시와 사서삼경 학문을 코에 걸고 무지한 시민들 앞에서 우쭐대는 그들을 보면 아니꼽고 가소롭지 않을 수 없다.
기울어가던 조선 말, 김삿갓 시인이 시골 서당의 훈장들에게 보낸 그 악의와 경멸의 이유로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곡산의 서당 훈장에게서 받은 그릇된 첫인상이었다. 그날 김성수의 손에 이끌려 서당으로 갔을 때 거느다란 염소 수염에 쥐눈을 가진 그곳 훈장의 초라한 강학과 계급 차등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던 삐뚤어지 당대 지식인의 표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기울어져 가던 조선조 말 당시 훈장은 아아들의 훈도와 교육이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등록금(禮租)을 언제까지 낼 수 있는가부터 다그쳐물었다. 그 다음이 학동들의 반상 출신이었다. 정작 맡아 가르쳐야 할 학동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뿐더러 배움이나 글에 대해서도 끝내 한마디가 없었다.
옛집 사랑방의 기억에서 되살려 낸 꼬장꼬장한 선비의 풍모는 그 훈장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듯이 오늘날 문필을 팔고 문화예술을 전당잡는 예술가의 당당함이 무너진 꼴이 흡사 꼭 빼닮았다. 김사갓의 어린 시절 면천 노비의 자식들이라 하여 그들 형제를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힌 그 훈장은 무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김병연 두 형제에게 천자문부터 디밀었다.
성질머리 고약한 초라한 훈장은 몰라도, 알아도 무조건 화를 내며 반년 뒤 그들 형제가 곡산을 떠나게 될 때까지 둘 모두 천자문에만 묶어 두었다. 짐작에는 새로 소학(小學)반을 시작하는 아이가 몇 생겨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던 것이다. 그 훈장의 기뻐함과 성냄과 밀쳐냄은 배우는 아이들의 재주나 정성의 많고 적음에 전혀 관심밖이었다.
대단찮은 글이라도 풍헌이니 좌수니 하는 재물깨나 있는 향반의 자식이 지으면 명문이네, 신동이네 치켜세우지만, 강학낭독하다 하찮은 구절이 막혀도 그들 형제같이 가난하고 이름 없는 백성의 자식일 때는 무슨 큰 배신이나 당한 듯 불같이 성을 내며 회초리를 들었다.
한 시대의 등대불이 선비나 예술인들이 자신의 품격을 잃고 이토록 초라해지거나 권력 있는 자들에게 머릴 조아리는 천박함을 더욱 절묘하게 표현한 대목을 살펴보자.
“항시 그 훈장의 주름진 입을 오물거리게 하던 식탐, 돈 주고 산 공명첩으로 거들먹거리는 엉터리 향풍들에게 보이던 비굴, 그리고 학동의 물음에 답이 막히면 성부터 내던 천학(淺學)” 그런 훈장의 여러 악덕은 뒷날 김삿갓 시인이 그들 부류 전체에게 품게 된 편견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세태는 변했지만 곰곰히 세상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면 망쪼가 들었던 조선조 말의 여항의 풍경화와 삐까번쩍하는 고층아파트 사이를 몰려가는 고급자동차 물결 속에 이 시대를 지켜야 할
선비 지식인들이나 문화예술인들의 외소하고 초라한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 이상규 교수는 국내 최고의 국어국문학자이다. 국립국어원장과 국어정책학회 회장,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와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로 고향 대구에서 집필과 후학 양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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