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무거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채권은 재산권이지만, 채무자는 추심의 대상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금융시스템의 안정성과 채무자의 재기 가능성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한 신용사회가 완성될 수 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어느 날 이름도 생소한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자라며 연락이 온다면 어떨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채권양도 제도를 통해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다. 채권양도는 채권자가 자신의 채권을 제3자에게 이전하는 법률행위로, 채무자의 동의 없이도 성립한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가 금융시장의 효율성을 위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채무자에게 과도한 부담과 고통을 안겨왔다는 점이다.
물론 채권양도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금융기관은 연체채권을 계속 보유할 경우 건전성 지표가 악화되고 새로운 대출 공급 능력도 감소한다. 따라서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것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과 자금 순환을 위해 필요한 기능이다. 문제는 채권이 반복적으로 재매각되면서 관리·감독의 사각지대로 흘러들어 가고, 결국 불법추심이나 과도한 채무 압박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에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좀비채권’ 문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은행 대출과 카드채무의 소멸시효는 일반적으로 5년이지만, 채권자들은 시효 만료 직전 지급명령이나 소송을 반복적으로 제기해 시효를 연장해 왔다. 그 결과 사실상 회수 가능성이 없는 채권이 수십 년 동안 살아남아 채무자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효가 완성된 채권마저 부활하는 관행이었다. 채무자가 시효 완성 사실을 모른 채 일부 금액을 변제하면 이를 채무 승인으로 간주해 전체 채무를 다시 청구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사법부와 입법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202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58년 동안 유지된 기존 법리를 변경하여 단순한 일부 변제만으로 시효이익 포기를 추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채무자가 시효 완성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실제로 권리를 포기할 의사가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채무자 보호의 새로운 전환점이라 평가할 만하다.
입법적 변화도 이어지고 있다. 개인채무자보호법은 채권양도 제한, 과도한 추심 방지, 채무조정 요청권 보장 등을 통해 채권 관리와 채무자 보호의 균형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개정 대부업법은 초고금리 대출과 폭행·협박 등 반사회적 수단을 동원한 불법 대부계약에 대해 원금과 이자 반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강력한 규제를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미국은 채권추심 과정에서 연락 시간과 횟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며, 유럽의 여러 국가 역시 장기 미회수 채권 거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채무자를 단순한 추심 대상이 아니라 경제적 재기의 주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채무자 보호는 결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회생, 개인파산, 신용회복제도와 같은 장치를 통해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채무를 조정하고 다시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건강한 신용사회란 채권자의 권리만 보장하는 사회가 아니라, 실패한 개인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 반복적인 채권 재매각에 대한 제한, 채권양도 이력의 투명한 공개, 소멸시효 완성 채권 거래 금지 여부, 자동화된 디지털 추심에 대한 규제 등은 앞으로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금융의 효율성과 채무자의 인간다운 삶 사이의 균형을 더욱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빚은 갚아야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채권은 재산권이지만, 채무자는 추심의 대상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다. 최근의 판례와 입법 변화는 채권자 중심으로 기울어졌던 저울추를 균형의 방향으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빚을 갚을 의무’와 ‘다시 일어설 권리’가 공존하는 금융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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