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명을 이끄는 불빛
온전한 나의 박탈을, 조건없이 어둠 속으로 밀어넣는 감정과 인식은 금방 빛의 프레임의 조형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깊이 빨려들수록 의식은 제빠르게 흘러간다. 타인의 삶속에 엉켜서 뒤섞였다 다시 풀려나는 구속과 자유의 언저리에는 침묵과 대사 그리고 소리의 뒤끓는 파도가 밀어닥친다.
글로 말로 대리하지 못하는 열정과 사랑 그리고 천둥소리 수식으로 못다한 슬픔과 분노를 한 촉 불빛으로 사람들의 심장으로 쏟아붓는 영화 스크린 바다에 모두가 뛰어든다.
영화에 담긴 서사는 늘 현재다. 지난 이야기도 또 미래 닥쳐올 일들도 지금, 오늘의 현실이다.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피로의 해독과정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어둠컴컴한 공간에서 타자의 삶을 통해 주체를 훈육하며 깨운한 감정을 온몸에 입히는 도피의 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예술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주체가 타자의 움막 속으로 내던져 맡기는 형식은 영화가 으뜸일텐데 뭔가 찾은 게 있어도 금방 소멸해버릴 영상 빛의 분열이 망막에서 사라지는 순간 다시 되될아온 주체, 이완된 긴장만 남는다.
한국전쟁이 끝날무렵 내 유년기 시절, 캄캄한 밤이 되면 미군 기지 철조망 넘어 어둠을 빛의 빗방울로 흐느적거리게 분산시킨 낡은 텍사스 기마병들의 총싸움질하는 영상물을 동네 친구들과 흥미진진 구경하였다. 자동차 휘발류 기름이 증발하는 뿌연 밤하늘 높게 선 가로등불빛이 졸 무렵 집으로 되돌아 왔다. 외방의 세계는 늘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낮 노랑머리 외인촌 아이들의 푸른 눈동자에는 오월 푸른 하늘에 뜬 흰구름이 흐르고 그 신비로운 타자의 세상을 훔쳐보는 일은 폭격의 소음과 하늘을 찢으며 날으는 폭격기 소음 공포와 사이렌의 두려움을 걷어내주는 듯했다.
영화는 모던을 상징하는 예술이다. 시적 은유와 소설적 서사가 있어 신비하고 관능적이기도 하고 윤리도덕적 훈육을 하는 거의 모든 상상을 담아내는 이미지이자, 텍스트이고, 사상의 성전이기도 하다. 내가 체험했던 무성영화에서 흑백시대와 천역색 시대를 건너 4D시대를 뛰어넘고 있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 다카하시백화점 영화관에 들어서자 달콤한 초클렛 향수가 캄캄한 어둠을 함뿍 적셨다. “초클릿”이라는 4D영상과 향수가 퍼져올랐다, 달콤한 은막의 영상까지 촉촉하게 젖었다. 영화는 이처럼 이전과 이후의 모든 상상을 현재화할 수 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는 “라시오타역에 도착하는 열차”라는 마법적 영상의 경이로움을 선사해주었다. 달려드는 기차에 몸을 옴추리며 소릴 질렀다. 내 친구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달려오는 기차의 오마주hommage로 처리되었던 장면과 겹친다.
영화는 제작 기술의 발전과 함께 구경꾼들을 스폰지처럼 컴컴한 영화관에서 쏟아지는 빛의 영상에 흠뻑 졌게 만들었다. 인간의 몸을 이처럼 감성에 담글 수 있는 영상 목욕탕이다. 그리고 돌아서면 흠뻑 젖었던 영상이 건조대에서 상쾌하게 마른 빨래처럼 쉬 휘발된다. 세계 대전 이후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상과 소리가 결합하면서 예술성보다 상업적 영상이 활개치는 동안 이탈리아 영화계에서는 수공예품같은 예술영화 제작에 돌입하였다.
인공지능(AI) 기술로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를 편집하거나, 배우의 과거 얼굴을 소환하는 등 콘텐츠 제작을 위한 창조적 기술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AI영화 '히어'에는 주인공 리키(톰 행크스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AI가 구현해 화제가 됐다. 'AI 디에이징'으로 불리는 이 기술은 AI 기반 신경망 모델링을 통해 배우가 과거에 출연한 작품을 바탕으로 영상 정보를 추출한 뒤, 촬영본 영상에 덧씌워 구현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새로운 언어와 창조적 인물과 케릭터를 만들어낸다. AI로 가상의 얼굴을 생성해 콘텐츠 속 인물의 얼굴로 변환하는 '버추얼 휴먼'을 비롯, 얼굴 변환 기술로 옛영웅적 인물의 생전 모습, 목소리, 말투 등을 복원하는 기술도 미디어 분야에서 쓰임새를 넓히고 있다.
영화는 인간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불빛의 언어다. 다 들어내어 보여주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감추기도 하는 영상의 메카니즘은 텍스트로 구성된 문학과 소리 그리고 이미지의 언어를 총동원하여 착각과 미스터리를 프레이밍하는 첨단의 의사전달 방식이다. 사람들마다 무게가 다른 언어를 한 가지 색깔로 빚어내는 영화 문법에 귀를 귀울려 봄직하다.

필자 이상규 교수는 국내 최고의 국어국문학자이다. 국립국어원 원장과 국어정책힉회 회장,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와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로 고향 대구에서 집필과 저술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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