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물길 위에서
- 김한식 시인 -
광교산 형제봉 능선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빗방울 한 점,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한 물길은
죽전과 오리, 정자와 수내를 지나
잠실의 불빛으로 흘러가고
또 한 물길은
황구지천의 낮은 허리를 따라
말없이 서해로 들어갑니다
그 물길을 따라
사흘 동안 걸었습니다
강물은 비행기 소리에 끊기고
마을길은 잡초에 묻혀
몇 번이나 길을 잃었습니다
탄천의 물빛은
유리처럼 맑았지만
황구지천에는
찢겨진 비닐하우스와
마을의 적막이
듬성듬성 앉아 있습니다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노래하던 시절,
논두렁 따라
바람과 더불어 걷고
저녁 연기 피어오르던
따뜻한 시간이 그립습니다
이제 들판은
사람의 체온을 잃어버리고
허리 굽힌 사람보다
녹슨 기계와 빈집이 많습니다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앞에
오래 서 있다가
평택역에서 다시 전철을 탔습니다
어둠 속을 들락거리는 불빛은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내가 걸어온 길은
황구지천 물길이 아니라
천천히 사라져가는
한 시대의 마지막 풍경이었습니다
- 해설 -
김한식 시인의 「사라지는 물길 위에서」는 단순히 황구지천을 따라 걸은 여정을 기록한 시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사라져가는 농촌과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한 시대의 퇴장을 물길의 이미지 속에 담아낸 깊은 문명 비판적 서정시입니다. 시인은 광교산에서 갈라지는 두 물길을 따라 걸으며 단순한 풍경의 차이를 본 것이 아니라, 오늘 한국 사회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시의 출발은 매우 조용합니다.
“광교산 형제봉 능선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빗방울 한 점,”
이 작은 빗방울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며 시대의 운명입니다. 같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한 물길은 탄천을 따라 도시의 중심으로 흘러가고, 다른 물길은 황구지천을 따라 서해의 낮은 갯벌로 흘러갑니다. 시인은 여기서 단순한 지리적 차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극명한 불균형과 문명의 기울어진 흐름을 바라봅니다.
탄천의 풍경은 유리처럼 맑습니다. 정돈된 길과 도시의 불빛은 현대 문명의 효율과 속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황구지천은 다릅니다. 길은 끊기고, 마을은 잡초에 묻히며, 찢겨진 비닐하우스와 적막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대비는 단순한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오늘의 문명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무엇을 버려왔는가를 드러냅니다. 특히 이 시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길 잃음’의 경험입니다.
“몇 번이나 길을 잃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도보 여행의 고생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잃어버린 삶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농촌은 늙어갔고 공동체의 온기는 사라져갔습니다. 시인이 황구지천을 따라 걸으며 반복해서 길을 잃는 장면은, 곧 인간다운 삶의 자리와 기억의 길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시의 중반부는 더욱 서정적으로 깊어집니다.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노래하던 시절,”
이 대목에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깊은 애도가 담겨 있습니다. 논두렁을 따라 바람과 함께 걷던 시간, 저녁 연기 피어오르던 마을은 가난했지만 인간의 체온은 살아 있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들판에는 사람보다 녹슨 기계와 빈집이 더 많습니다. 이 풍경은 단순한 농촌의 쇠락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점점 생명과 관계를 잃어가는 문명의 피로를 상징합니다.
시의 마지막은 특히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황구지천 물길이 아니라
천천히 사라져가는
한 시대의 마지막 풍경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는 단순한 기행문이나 향토 서정을 넘어섭니다. 시인이 걸은 것은 강물의 길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기억이며 인간적인 삶의 흔적입니다. 황구지천은 더 이상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잊혀가는 농촌과 쇠락해가는 생명의 자리, 그리고 개발과 속도의 시대 뒤편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상징이 됩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힘은 거대한 비판을 격렬한 언어로 외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는 끝까지 낮고 조용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제 속에서 더 깊은 슬픔과 무게가 스며 나옵니다. 시인은 폐허를 고발하기보다, 사라지는 풍경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의 침묵으로 시대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사라지는 물길 위에서」는 단순한 농촌 회고의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길을 따라 걸으며 한 시대의 뒷모습을 바라본 인간의 기록이며, 속도와 효율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조용히 묻는 깊은 문명 비판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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