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키워드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콜롬비아=양삼일] 누가 한국의 '중남미화'를 말하는가...눈에 보이는 적, 그리고 숨어 있는 권력...

  • 콜롬비아=양삼일 기자
  • 입력 2026.06.04 23:35
  • 글자크기설정

“권력은 누군가의 억압적으로 휘두르는 힘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미쉘푸코

누가 한국의 '중남미화'를 말하는가: 기억과 진영 사이에서

눈에 보이는 적, 그리고 숨어 있는 권력

'중남미화'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일종의 심리적 두려움처럼 반복되어 왔다. 포퓰리즘과 무질서, 부패와 거리 정치, 좌우 대립, 타협보다 승패를 먼저 요구하는 노사관계. 마치 한국이 그런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처럼.

한국 사회 일각에서 흔히 전가보도처럼 꺼내 드는 이 '한국 사회의 중남미화(포퓰리즘으로 인한 국가 파산 마케팅)'라는 주장은, 구조적 정보 왜곡과 개인적 경험의 일반화 오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착시 현상에 가깝다.

왜 이 착시는 반복되는가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작동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한국 언론이 접하는 중남미 뉴스의 소비 방식에 있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 대부분은 AP, 로이터, AFP 등 미국과 유럽의 대형 통신사를 거쳐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중남미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나 역동적인 사회 운동은 거세된 채, 마약 카르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치안 불안 같은 자극적인 뉴스 위주로 선별 수입된다. 구조를 보지 못하고 현상만 보니 '복지 정책을 쓰면 저렇게 망한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로 왜곡하기 쉽다.

여기에 미국 내 한인 교포 사회의 제한적 시선이 편견을 더한다. 미국을 방문하거나 현지에 정착한 한인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중남미 출신 이주 노동자들은 주로 식당 뒷골목이나 마트의 하급 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중남미 전체를 저평가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그러나 실제 중남미는 다르다

실제 미국 내 히스패닉(라티노) 커뮤니티의 규모와 영향력은 이러한 편견을 완전히 뒤엎는다. 미국 연방 통합인구조사국(Census)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는 전체의 약 19~20%를 차지하며 백인 다음으로 가장 큰 인구 집단이 되었다. 미국인 5명 중 1명은 히스패닉인 셈이다.

공화당 정권조차도 이들을 배제하고는 국정을 운영할 수 없을 만큼, 히스패닉 공동체는 미국 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쿠바 이민자의 아들로 국무장관에 지명된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연방 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까지 미국의 핵심 권력기관 곳곳에 이들이 포진해 있다.

나아가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근처로 끌어오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의 핵심 기지로서 중남미는 미국과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중남미는 결코 멀고 낙후된 대륙이 아니라, 글로벌 정치 지형을 움직이는 거대한 지렛대다.

정작 닮아가는 건 한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한국 사회는 이미 상당 부분 그들이 비하하던 중남미의 어두운 모습들을 닮아가고 있다. 양극화와 혐오, 끝없는 진영 대립, 정치적 적대감, 정서적 동원 정치. 심지어 유튜브 알고리즘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한국은 더 이상 스스로 상상하던 '합리적 근대국가'의 자화상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중남미에서 문화예술교육과 국제교류 현장을 살아왔다. 한국 사회가 중남미를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일종의 단순화와 오만함을 종종 본다. 국가폭력과 독재, 빈곤과 마약 카르텔 속에서도 사람들은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추었으며, 시를 쓰고 공동체를 복원하려 했다.

한때 마약과 폭력의 대명사로 불렸던 메데진(Medellín)이 혁신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도 문화와 예술이 있었다. 도서관과 문화센터, 빈민가의 음악학교, 공동체 예술교육은 폭력 이후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남으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우리가 진짜 무서워한 것

오히려 나는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무서워했던 건 중남미였을까. 사실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끝까지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힘들어했던 건 아닐까.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피곤하다. 시끄럽고, 답답하고, 때로는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결국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 체제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불편함보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고 충돌이 적은 사회를 더 원했던 것은 아닐까.

문제는 이런 복잡한 현실을 우리는 종종 지나치게 단순한 문장과 진영 논리로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불편한 민주주의의 현실을 차분히 들여다보기보다, 누군가는 '중남미화'라는 공포를 반복하고, 또 누군가는 특정 철학자의 문장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소비한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습관에서 나온다. 복잡한 현실 앞에서 편리한 말 한마디를 찾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맥락 없이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진실처럼 굳어버린다.

한때 한국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마치 절대 진리처럼 반복하며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곤 했다. 실제 플라톤의 기록 어디에도 그런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그것을 사실처럼 확대 재생산했다. 오늘날 우리가 미셸 푸코나 한병철 같은 사상가들을 소비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영이 원하는 문장만 골라 쓴다. 맥락은 지운다.

'중남미화'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 담고 있어야 할 역사와 구조는 사라지고, 공포만 남는다.

내 안의 작은 독재를 경계하라

우리는 보통 권력이라고 하면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 뉴스에 나오는 독재자나 부패한 정치인, 혹은 우리를 억압하는 거대한 국가기관 같은 것만 떠올린다. 그래서 '저 나쁜 사람들만 없어지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텐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셸 푸코가 던진 질문은 조금 더 불편하다. 권력은 꼭 대통령이나 국가기관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학교와 회사, 언론과 인터넷, 인간관계 속에도 스며 있다. 심지어 '우리는 정의롭다'고 믿는 우리 편의 말과 행동 속에서도 권력은 똑같이 작동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와 올바른 뜻을 가지고 출발했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옳으니 너희는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르라'고 선을 긋는 순간, 그 정의감은 타인을 짓누르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 되어버린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그토록 증오하던 옛 권력의 폭력적인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비극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보아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가 비판하는 저들의 권력뿐만 아니라, 선한 의도로 포장된 내 안의 작은 독재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코나무 13(Comuna 13) 베데진. 한때는 폭력과 무장조직의 상징이였지만 오늘날에는 벽화와 음악,문화예술을 통해 공동체 회복의 상징으로 다시 주목받는 지역이다.

메데진의 눈물을 씻는 예술의 언어

그렇다면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적대하게 되는 사회는 무엇으로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폭력과 갈등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지금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다시 설명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을 단순히 '분쟁과 마약 문제의 나라'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통해 평화와 공동체 회복을 만들어가는 나라로 새롭게 설명하려 하고 있다.

2026년 콜롬비아에서는 '이베로아메리카 문화예술교육 회의 - 평화를 위한 예술(Artes para la Paz)'이 열렸고, 이베로아메리카 20개국 문화부는 예술교육 협력 네트워크 창설에 합의했다. 콜롬비아는 OEI, UNESCO, SEGIB 같은 국제기구들로부터 예술교육 정책 성과를 인정받으며 네트워크 의장국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Artes al Aula'(교실 속 예술) 법이 제정되어 전국 6,000개 공립학교로 예술교육이 확대되었다. 예술교육은 학교만이 아니라 교도소, 공공도서관, 지역 문화센터까지 확장되었다. 약 100만 명의 아동과 청소년이 예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콜롬비아 정부는 문화가 단순한 국가 이미지 홍보 수단이 아니라 국가 회복의 핵심 인프라라고 말한다. 마림바 음악, 동네 도서관, 공동체 축제, 주민 연극 활동 같은 문화적 실천들이 폭력 이후에도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었다. 상처를 기억으로, 기억을 다리로, 예술을 공동체 재건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다.

낭만화도 아닌, 비하도 아닌 시선으로

물론 그렇다고 중남미의 현실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남미는 여전히 부패와 치안 불안,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 같은 거대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극단적인 계층 구조와 토지·권력 집중은 지금도 쉽게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오늘날 중남미의 많은 충돌은, 오랫동안 소수에게 독점되었던 기회와 권력을 보다 넓게 나누려는 과정 속에서 터져 나오는 진통인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한국 사회 역시 양극화와 세대 갈등, 남녀 사이의 깊어진 불신, 지역과 계층의 고착화, 진영 정치의 피로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다.

미국과 중남미 사회는 인종과 계층, 지역과 이념의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할 때 사회는 쉽게 분열되고,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증오와 동원의 정치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한국 역시 지금의 갈등을 단순한 인터넷 논쟁이나 일시적인 정치 현상 정도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는 서로 다른 불안과 분노가 빠르게 충돌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전에는 같은 동네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분위기와 이웃 간의 정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대와 성별, 지역과 계층, 정치 성향에 따라 서로 너무 다른 현실 속에 살아가다 보니, 같은 나라 안에서도 점점 서로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게 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중남미가 보여주는 것은 분열이 한번 깊어지면 되돌리는 데 수십 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 예술과 문화로 그 상처를 봉합하려 한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밀려나고 있다고 느끼고, 또 누군가는 자신만 계속 손해 보고 있다고 느낀다.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기보다, 상대를 경쟁자나 적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우리 역시, 서로를 다시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콜롬비아 양삼일=아시아이베로 아메리카재단 이사장]

ⓒ 굿리더뉴스 & goodleadernew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추천뉴스

  • [굿리더뉴스] 서울시내 골목골목으로 몰려드는 해외 관광객
  • [굿리더뉴스] 세계 물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한국의 과학자..
  • [굿리더뉴스] 한미동맹, 정보공유 문제 없나?
  • [굿리더뉴스] 백악관 대변인은 반드시 우파 금발의 미인이어야 한다!?
  • [굿리더뉴스] 주춤하던 광주 반도체, SK 최태원이 다시 속도 낸다..
  • [굿리더뉴스] 국힘 6선 조경태 의원이 갑자기 노무현 묘역을 참배한 까닭은?
  • [무주=남상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전북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
  • [굿리더뉴스] 여권 강경파에게 던지는 이대통령의 초고강도의 레드카드..
  • [굿리더뉴스] '벌거벗은 트럼프', 유럽의회에 등장하다..
  • [굿리더뉴스] 손흥민, 차범근을 뛰어넘었다..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콜롬비아=양삼일] 누가 한국의 '중남미화'를 말하는가...눈에 보이는 적, 그리고 숨어 있는 권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