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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양삼일] 2026년에 다시 들여다봐야 할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

  • 콜롬비아=양삼일 기자
  • 입력 2026.06.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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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n't Cry for Me Argentina' - 불행했던 군인, 페론과 아르헨티나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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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에 다시보는 아르헨티나의 패로니즘 

 

[콜롬비야=양삼일] 팔로마 산 바실리오(Paloma San Basilio)의 스페인어 버전 'No llores por mí Argentina'와 마돈나(Madonna)의 영어 버전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번갈아 들으며 아르헨티나 관련 사진들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원곡은 영어 뮤지컬 'Evita'였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오히려 스페인 가수 팔로마 산 바실리오의 버전이 더 강한 정서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세대도 많다.


그러면서 문득 권력의 정점과 몰락, 그리고 긴 망명을 모두 경험했던 한 정치인, 후안 페론(Juan Perón)이라는 남자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군인, 권력의 중심에 서다


한국에서는 에바 페론(Eva Perón), 이른바 에비타(Evita)를 말하면 대부분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영화의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가난한 사람들의 성녀, 눈물의 연설, 카리스마 넘치는 퍼스트레이디 같은 기억들 말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신화의 뒤에는 훨씬 복잡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후안 페론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원래 직업 군인이었다. 그가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이던 1943년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겉으로는 세계적인 부국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부정선거, 보수 엘리트 정치, 노동자 계층의 불만이 쌓여가던 나라였다. 이 시기를 아르헨티나 역사에서는 흔히 '악명 높은 10년(Década Infame)'이라고 부른다.


1943년 젊은 장교 그룹인 통일장교단(GOU)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후안 페론도 이 군부 흐름 속에서 정치에 들어온 장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직후 페론이 맡은 자리는 처음에는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노동부라기보다 노동·사회보장국에 가까운 자리였다. 많은 군인들이 그 부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페론은 전혀 다르게 보았다. 그는 노동자를 억압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동맹으로 보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 유급휴가, 퇴직금, 노동조합 권리 강화 같은 정책을 밀어붙였고, 기존 정치권에서 늘 주변부 취급을 받던 노동자들은 점점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그 작은 부서는 훗날 중남미 대중정치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되는 페로니즘(Peronismo)의 출발점이 되었다.


 

에비타와의 만남


그때 페론의 곁에는 첫 번째 부인이 없었다. 첫 부인 아우렐리아 티손(Aurelia Tizón)은 페론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중심에 오르기 전인 1938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만난 계기는 1944년 산후안 대지진이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재난 현장을 위한 모금 행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루나 파크(Luna Park) 경기장에서 열렸고, 그 자리에서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45년 결혼한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권력자와 젊은 배우의 만남 정도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에비타에게는 매우 강한 정치적 소명이 있었다. 단순한 야망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에비타는 가난한 사생아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차별과 멸시를 경험했고, 상류층 사회로부터 무시당하는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경험 때문에 그녀는 노동자와 빈민들의 상처와 분노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에비타는 단순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었다. 노동자 집회에서 직접 연설했고, 여성 참정권 확대 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병원과 복지 재단, 장학 사업, 빈민 지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그녀 역시 개인숭배와 감정 정치(politics of emotion)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녀에게서는 놀랄 만큼 축재와 사익 추구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은 그녀를 권력의 여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과 가난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왔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에비타는 지금도 단순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어딘가 '우리 편'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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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는 단순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었다. 많은 노동자와 서민들은 그녀를 ‘우리 편’으로 기억했다

 

에비타가 사라진 뒤

 

문제는 에비타의 죽음 이후였다.


페론 정권은 시간이 갈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언론 통제와 야당 탄압, 반대 세력에 대한 압박도 커졌다.


나는 페론이 점점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기울어간 데에는 에비타의 죽음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에비타는 단순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었다. 그녀는 노동자와 서민의 분노와 열망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창구였고, 동시에 페론의 권력을 민중의 언어로 번역해주는 존재에 가까웠다. 그녀가 사라지자 페론은 민중의 열망과 정적들의 비판을 조율할 중요한 장치를 잃었다.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된 뒤, 페론의 망명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파라과이와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거쳐 결국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에 정착하게 된다.


군부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1955년 9월, 군부는 스스로를 '자유혁명(Revolución Libertadora)'이라 불렀다. 페론을 몰아낸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이끈 로나르디(Lonardi) 장군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선언했다. 페론주의자들과 타협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강경파는 달랐다. 로나르디가 집권한 지 불과 51일 만에 군부 내 강경파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람부루(Aramburu) 장군이 권좌를 차지했다. 그는 페론의 이름을 법으로 금지했다. 노래도, 글도, 사진도 모두 금지됐다. 에비타의 시신은 비밀리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묘지에 가짜 이름으로 묻혔다.


그러나 금지된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억압할수록 페로니즘은 노동자와 서민 사이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군부에 쿠데타가 이어졌다. 민간정부가 들어섰다가 다시 군부가 엎었다. 1966년에도 쿠데타. 아르헨티나는 18년간 불안정 속을 표류했다.


1971년 집권한 라누세(Lanusse) 장군이 현실을 직시했다. 게릴라 폭력이 커지고, 민중 불만이 폭발하고, 군부 통치는 한계에 달했다. 그는 페론주의 금지를 풀고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후보는 선거 전까지 아르헨티나에 거주해야 한다. 페론을 직접 막는 조항이었다. 그럼에도 라누세는 "페론이 못 오는 게 아니라 안 오는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페론은 흔들리지 않았다. 측근 캄포라(Cámpora)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1973년 3월 캄포라가 당선됐다. 그리고 49일 만에 스스로 사임했다. 페론이 직접 출마할 자리를 비워준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 군부는 15년간 밀라노에 숨겨뒀던 에비타의 시신을 페론에게 돌려줬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있었다.


1973년 9월, 페론은 60% 이상의 압도적 표로 당선됐다. 라누세는 대통령궁을 떠나던 날 군중에게 침을 맞았다. 18년간 금지됐던 이름이 다시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

 

 

노장이 돌아왔다


그러나 18년의 망명 끝에 권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77세의 노장이었다. 군인에게도 세월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에비타도 없었다.


권력과 쿠데타, 망명과 상실을 모두 경험한 그는 점점 피로하고 외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그는 정치적 기반도 약하고 준비도 충분하지 않았던 이사벨을 자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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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공백은 종종 가장 위험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여기에는 단순한 정치 계산 이상의 감정도 있었는지 모른다. 페론은 이사벨에게 단순한 아내 이상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처럼 보인다. 죽은 에비타의 빈자리를 메워줄 존재, 쇠퇴해가는 자신의 신화를 다시 이어줄 상징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사벨 역시 자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살아 있는 자신으로 사랑받기보다, 죽은 에비타의 그림자를 연기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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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신보다, 죽은 에비타의 그림자를 연기해야 했던 여자.

 

1974년 7월 1일, 후안 페론은 사망한다. 이사벨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가운데 한 명이 되었지만, 준비된 지도자는 아니었다. 죽은 에비타의 그림자를 평생 연기해야 했던 여자. 국민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에비타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심리적 공백 속으로 한 남자가 파고들었다. 호세 로페스 레가(José López Rega). '마법사(El Brujo)'라 불린 그 남자는 이사벨의 내면을 정확하게 읽었다.

 

사실 이사벨은 어린 시절부터 영적 세계에 익숙한 여자였다.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강신술을 행하는 크레스토(Cresto) 가족과 함께 자랐다.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르고 영매를 통해 소통한다는 믿음이 그녀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레가는 바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레가는 이사벨에게 속삭였다. "에비타의 영혼을 당신 안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식이 시작됐다. 마드리드 저택 밀실. 방부 처리된 에비타의 시신이 놓인 긴 탁자. 레가는 이사벨을 그 시신 곁에 눕혔다.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촛불을 켰다. 주문을 외웠다. 손을 이사벨의 몸 위로 천천히 움직이며 영적 에너지를 전이시키는 의식을 집행했다.

 

아르헨티나 정치인 호르헤 팔라디노(Jorge Paladino)는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훗날 증언했다. 그는 그것을 "검은 마술(magia negra) 의식"이라고 불렀다.

 

이사벨은 이 의식을 반복해서 받았다. 레가는 의식이 끝날 때마다 에비타처럼 머리를 올려 묶으라고 했다. 에비타의 말투를 연습하라고 했다. 에비타의 손짓을 반복하라고 했다. 이사벨은 따랐다. 그리고 스스로가 에비타의 재림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믿고 싶은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그 사람이 간절히 믿고 싶어할 때는. 그렇게 점성술판이 국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사파레시도스


레가가 만든 AAA의 폭력 방식은 1976년 비델라 군부 쿠데타 이후 국가 시스템 차원의 테러로 확대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 희생자들을 지금도 실종자들,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라고 부른다.


나는 5월 광장의 어머니들에게서 살아남은 자들이 끝내 죽은 자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본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 남도의 씻김굿과도 닮아 있는지 모른다. 죽은 자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채, 산 자들이 끝내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며 몸으로 슬픔을 견뎌내는 의식 같은 것 말이다.


사진들을 보다 보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 위에 검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서 있고, 밀물이 밀려오며 그 기억들을 바다 속으로 쓸어가려 하는 장면 말이다. 역사 속에는 언제나 지우려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끝내 잊히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다.


 악순환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페론은 돌아왔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군인에게도 세월은 예외가 아니었다. 1974년 7월 1일 그는 사망했다. 그리고 죽은 에비타의 껍데기를 입은 여자가 대통령궁을 물려받았다.


이사벨의 뒤에는 마법사 레가가 있었다. 점성술판이 국정을 결정했다. 능력이 아닌 충성이 공직의 기준이 됐다. 나라가 서서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던 군부가 이를 갈았다.


1976년 3월, 군부가 다시 움직였다. 군부는 "질서 회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들이 18년간 당한 수모였다. 금지당한 이름, 침을 맞으며 퇴장한 라누세, 점성술사에게 나라를 빼앗긴 치욕. 그 분노가 더러운 전쟁으로 터졌다. 최대 3만 명이 사라졌다. 재판도 없었다. 이유도 없었다. 군부는 나라를 바로잡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복수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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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는 질서를 말했지만, 결국 더러운 전쟁은 수만 명의 실종자를 남겼다.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은 외침을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외적은 보인다.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공권력이 친분과 충성 순서로 배분되기 시작할 때, 그 붕괴는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다정한 이미지, 눈물의 연설, 충성 경쟁, 이상한 영적 언어들, 그리고 "우리 편이면 괜찮다"는 분위기. 권력의 사유화는 언제나 이런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들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결국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돌아간다.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그 청구서를 갚고 있다. 50년째. [글=양삼일 아시아이베로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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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은 끝내 죽은 자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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