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돌목의 이순신 정신,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지강 양한묵 선생...
[콜롬비아=양삼일] 남도의 바다가 거칠게 몸부림치는 공간, 울돌목(명량해협)을 아는가? 물살이 너무 거세 바다가 마치 울부짖는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 명량. 남도의 사람들에게 이 바다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전쟁과 죽음, 원한과 생존을 삼켜온 거대한 시간의 소용돌이였다. 울돌목, 명량해협, 그리고...
울돌목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133척의 왜선을 무너뜨린 승리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전설 같은 승리는 결코 장군 한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해남과 진도의 평범한 어민들과 민초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와 물길을 안내하고 군량을 나르며 함께 싸웠기에 가능했던 민중적 연대의 역사였다. 남도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몸으로 역사를 버텨냈다.
지강 양한묵, 울돌목에서 길어 올린 인간 존엄
이 울돌목의 세찬 물살을 바라보며 소년기를 보낸 인물이 바로 지강 양한묵 선생이다. 3.1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끝까지 대한독립의 기개를 지킨 분이다. 그 양한묵 선생의 직계 종손인 필자는 청년 양한묵이 그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패배주의 대신 호연지기를 품었던 당시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국운이 기울어가고 민초들이 국가와 외세의 폭력 앞에서 신음하던 시절, 양한묵 선생은 울돌목의 거친 물살 속에서 하나의 확신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권력이라도 의(義)를 끝내 이길 수는 없으며, 나라를 마지막까지 떠받치는 힘은 결국 저 바다를 닮은 민초들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이후 화순 능주로 이주해 동학농민혁명 시기 관군에게 쫓기던 농민군들을 숨겨주고 돕는 등 언제나 가장 낮은 사람들의 편에 섰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시대의 혼란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라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남도의 깊은 슬픔과 동학의 민초적 세계관은 하나의 거대한 철학으로 개화하기 시작한다. 동학은 본래 “사람 안에 하늘이 있다”는 시천주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강 양한묵 선생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흩어져 있던 동학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서구의 근대 인간학과 민주주의 사상과 연결시키며, 가장 천대받는 민초 자체가 곧 하늘이라는 급진적 인간 존엄의 철학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인내천의 진정한 사상적 설계자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우상화와 장막 뒤에 가려진 중대한 진실 하나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성사가 수십만 농민군을 이끌던 영웅적 지도자이자 실천적 정치가였다면, 동학의 파편화된 사상을 체계화하고 천도교의 근대적 교리와 철학을 정립하며 ‘인내천’ 사상을 공식화한 진정한 사상적 설계자는 바로 지강 양한묵 선생이었다.
그 결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체법경’이다. 여기에서 지강 선생은 인간을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나 구원의 객체로 보지 않았다. 가장 낮은 사람 안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선언, 곧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사상은 당시 시대정신 속에서 극히 혁명적인 언어였다. 왕과 국가, 신분과 권력이 인간 위에 군림하던 시대에 가장 낮은 민초의 존엄을 하늘과 같은 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사 속 가장 급진적인 인간 해방 선언 가운데 하나였다.
후대 천도교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상적 체계화 작업과 ‘무체법경’의 철학적 기반을 손병희 성사의 단독 업적으로 설명하거나 공저 형태로 정리하려는 흐름도 존재했다. 그러나 문체와 사상적 구조, 그리고 당시 역사적 흐름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연구자들은 지강 양한묵 선생의 철학적 기여를 핵심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남도의 민초들이 몸으로 견뎌낸 슬픔과 공동체 정신은 그의 사상 속에서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의 토대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인내천의 감각이 단지 철학 이론으로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폭력과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으려 했던 남도 민초들의 삶의 태도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백성을 두고 혼자 살 수 없다”는 감각, 가장 낮은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윤리, 억울하게 죽은 넋들을 끝내 잊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후 남도의 문학과 판소리, 시나위와 씻김굿 속으로까지 흘러 들어갔다.
제주의 눈물에서 시작된 비극은 그렇게 여순과 장흥, 보성을 지나 해남과 화순에 이르러 단순한 슬픔을 넘어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사상적 응전으로 개화하게 된다. 남도의 사람들은 총칼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경험을 단지 원한으로만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인내천이라는 사상으로 끌어올렸고, 다시 소리와 문학과 의례 속에 담아 후대에 전했다.
남도 슬픔의 거대한 깔대기, 진도씻김굿
그렇다면 이 깊은 한과 위대한 사상은 어떻게 남도 예술의 정수인 씻김으로 응축되어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을까. 그 정화와 치유의 대서사는 이제 울돌목의 물살을 따라 진도로 이어진다.
흔히 사람들은 진도 씻김굿을 단순한 지역 무속 문화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그 인문학적 실체는 훨씬 깊고 넓다. 진도씻김굿은 보성의 소리와 장흥의 문학, 해남 대흥사의 불교적 세계관과 남도 민초들의 한, 그리고 인내천의 인간 존엄 정신이 울돌목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통과하며 정제된 남도 정신문화의 집대성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씻김굿의 본질이다. 씻김굿은 단순히 죽은 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는 종교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적 치유의 장이었다. 국가폭력과 전쟁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고도 마음 놓고 울 수 없었던 사람들, 연좌제의 공포 속에서 가족의 죽음조차 크게 애도할 수 없었던 남도의 민초들에게 굿판은 유일하게 허락된 통곡의 공간이었다.
군경의 눈이 무서워 곡소리조차 삼켜야 했던 시대, 사람들은 굿판의 신명과 시나위 가락 속에 숨어 비로소 눈물을 터뜨릴 수 있었다. 남도의 사람들은 울 수 없었던 시대에 굿판에서 대신 울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보성의 소리로 목청을 열고, 장흥의 이야기로 기억을 붙들었으며, 춤으로 억눌린 한을 털어냈다. 씻김굿은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인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붙드는 마지막 공동체의 언어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한강은 제주 4·3의 비극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는 지워진 기억을 끝까지 붙들고 애도하려 한다. 국가와 이념의 이름 아래 사라져간 개인의 신음과 침묵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복원하려 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비극을 기록하기 때문이 아니다. 작품은 지워진 이름들을 끝내 놓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진도 씻김굿의 애도 구조와 깊게 맞닿아 있다.
씻김굿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는 영돈(시신을 상징하는 돗자리)을 향해 향물과 쑥물, 맑은 물을 차례로 붓고 지전으로 정성스럽게 문질러 닦아내는 장면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지워졌던 한 인간의 존엄을 다시 호명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공동체가 함께 어루만지는 과정이다. 한강의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망각 속에 묻힌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현대적 씻김의 언어다.
오는 9월, 콜롬비아 메데진 국제도서전 무대에 오를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원민 교수의 씻김굿 연출은 바로 이 거대한 남도 정신사의 흐름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보성의 소리와 장흥의 문학, 해남과 화순의 정신, 그리고 진도의 씻김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며 메데진의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전통문화 공연이 아니라, 한국 남도의 기억과 콜롬비아의 상처가 예술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역사적 만남이다.
메데진은 오랜 내전과 마약 카르텔의 폭력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도시다. 한때는 총성과 납치, 암살과 공포가 일상이던 곳이었다. 산비탈의 빈민가에서는 국가보다 먼저 카르텔의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도착했고, 많은 아이들은 총소리를 들으며 잠들어야 했다.
그러나 메데진은 폐허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케이블카와 야외 에스컬레이터는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도시 아래로 밀려났던 사람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올리는 인간 존엄의 사다리였다. 메데진은 총 대신 도서관을 세웠고, 감시탑 대신 미술관과 과학관을 세웠다. 거리의 벽화와 음악, 춤과 공동체 예술은 죽음의 기억 위에 다시 삶의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메데진의 회복은 남도가 걸어온 길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남도의 사람들 역시 국가폭력과 가난, 침묵의 시대를 견디며 소리와 문학, 의례와 공동체 정신을 통해 인간 존엄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록할 수 없었던 시대에 판소리로 기억했고, 소설로 숨겼으며, 씻김굿의 마당에서 대신 울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인내천이라는 철학과 씻김굿이라는 예술적 언어 속에 살아남았다.
공공외교, 상처 입은 공동체들의 연대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공외교(New Public Diplomacy)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의 외교가 국가 이미지 홍보나 문화 우월성의 과시에 가까웠다면, 이제 세계는 상처 입은 공동체들이 서로의 기억을 이해하고 예술을 통해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 존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가장 천대받는 민초가 곧 하늘이라는 지강 양한묵의 선언과, 지워진 기억과 끝내 작별하지 않겠다는 한강의 다짐, 그리고 모든 원한을 씻어 평화의 바다로 보내는 김원민 교수의 춤사위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어떻게 하면 다시는 국가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
남도의 붉은 황토와 갯벌,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품어온 인간적인 슬픔과 강인한 기개가 메데진의 무대에 울려 퍼질 때, 한국 남도의 기억은 비로소 국경을 넘어 인류 보편의 위로와 평화의 언어로 확장될 것이다. 어쩌면 씻김이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붙드는 마지막 방식인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역사의 아픔이 미래의 기쁨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콜롬비아=양삼일 아시아이베로 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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