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양삼일의 중남미 시선 21] 콜롬비아에서 예술교육 이야기를 하면 종종 한국 사람들이 예상하는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예술교육을 창의성이나 문화 향유 차원에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평화, 기억, 공동체 회복이라는 단어가 훨씬 먼저 나온다. 왜냐하면 콜롬비아에서 예술은 단순한 취미나 교양이 아니라, 오랜 폭력과 불신 속에서 서로를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5월 14일, 콜롬비아 문화부가 주최한 국제포럼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OECD 교육연구혁신센터 연구자, 브라질 OEI 교육 담당자와 함께 자리했다. 주제는 ‘글로벌 의제 속 예술교육과 교육 시스템의 전환’이었다. 거창한 제목처럼 들리지만, 결국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왜 지금 세계는 다시 예술교육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는가.
포럼에서는 반복적으로 두 개의 단어가 등장했다. ‘웰빙(wellbeing)’과 ‘사회정서 역량(socioemocional)’이었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편집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기술을 다룰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이 이미지와 이야기 뒤에 어떤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있는가를 읽고 질문하는 능력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공감 능력과 상상력, 기억을 이해하는 힘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교육계가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제를 이론보다 먼저 현장에서 배웠다. 우리 재단이 콜롬비아 국립경찰청, 한국국제교류재단(KF),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KACES), 그리고 한국 예술단체들과 함께 깔리·부에나벤뚜라·카르타헤나 지역에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시기였다. 폭력 피해 지역의 아이들과 경찰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처음 분위기는 차갑고 조심스러웠다. 어떤 아이들은 경찰을 두려워했고, 경찰 역시 아이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오랜 폭력과 마약 카르텔, 빈곤의 기억이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가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과정 자체였다. 현지 파트너들은 먼저 지역 어머니들과 접촉했다. 아이들을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경찰들과 함께 들어오지만 단속이나 체포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다.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약속을 요구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지역에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들도 협조하겠다는 대신, 경찰 역시 무력을 사용하거나 강압적으로 행동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외부에서는 흔히 ‘위험 지역’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안의 어머니들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자식들이 교육을 통해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위험한 지역이라는 말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곳 역시 결국 누군가의 집이고 삶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그램에서 몸을 사용하는 예술 활동이 이어졌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형태를 만들고, 함께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언어로는 쉽게 좁혀지지 않던 거리가 몸의 리듬 안에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마지막 날이었다. 경찰과 아이들이 함께 춤을 췄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프로그램 장면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예술교육의 의미를 가장 강하게 보여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로를 위험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같은 리듬 안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정책 문서나 통계표에는 잘 담기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예술교육의 힘은 바로 이런 순간에 드러난다. 예술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기억, 두려움과 편견을 안전하게 표현하게 만든다. 연극은 갈등을 다시 성찰하게 하고, 음악과 춤은 공동체의 기억을 회복하게 하며, 벽화는 지역의 상처와 희망을 공적 공간에 남긴다.
그래서 콜롬비아에서는 예술교육이 단순한 문화 프로그램이 아니다. 평화교육이고, 기억교육이며, 공동체 회복의 언어다. 2025년 콜롬비아 정부가 제정한 ‘Artes al Aula’ 법 역시 예술교육을 일부 학생만의 특권이 아니라 공립학교 학생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로 규정했다. 의미 있는 출발이다. 하지만 법이 만들어졌다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예술을 다른 교과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술가 역시 학교와 아이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지역 격차와 인프라 문제도 여전히 크다.
포럼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예술교육이 교육 의제에서 밀려날 때, 잃는 것은 단순히 예술 수업 시간이 아니다. 결국 문화 접근권의 불평등이 커진다. 경제력이 있는 가정은 사교육과 문화 체험으로 이를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저소득층과 농촌 지역, 분쟁 피해 지역 아이들은 예술 경험 자체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2005년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을 제정하고 KACE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교육을 정책으로 제도화해 온 경험이 있다. 2010년 서울 UNESCO 세계예술교육대회의 ‘서울 어젠다’는 지금도 국제 예술교육 논의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언급된다. 동시에 한국은 세계적인 콘텐츠 산업과 창의산업을 만들어낸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입시 경쟁이 심해질수록 예술 과목은 가장 먼저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실 역시 존재한다.
포럼이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아 있었다. 경찰과 아이들이 함께 춤을 추던 그 오후. 누군가에게는 작은 지역 프로그램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한 체험 활동이 아니었다. 서로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같은 리듬 안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예술교육의 본질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 방법이다. [콜롬비아=양삼일 아사이이베로 아메리카 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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