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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4] 인공지능 시대, 우리말은 안전한가

  • 이상규 교수 기자
  • 입력 2026.05.0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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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4] 인공지능 시대, 우리말은 안전한가?

비가 오는 날, 기압이 낮아지면서 사람들의 감성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창가에 앉아 오마져 하지도 않은 님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볼 낭만을 그려본다. 한여름 쏟아지는 소나기와 휩쓸고 지나간 소나기의 꼬리를 물고 얼굴을 내민 태양이 신기하다. 하늘 이편에는 여우비가 쏟아지는데 저 건너편에는 구름 사이로 태양이 떠오른다. 봄날 빨간우산, 파란우산, 까만우산 머릴 맞대며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등굣길을 가는 어린이들을 보며 지나간 유년기 추억에 잠겨본다. 우리 말에서 비를 뜻하는 어휘들이 빗줄기 크기나 상황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능개비, 안개비, 보슬비, 가랑비, 여우비, 소나기처럼 다양한 정서와 경험이 머리에 떠오른다.

지역 환경에 따라 언어의 분화가 큰 차이를 보여 주기도 한다. 미국 컬럼비어대학교 유명한 민속학자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가 어떤 언어는 눈을 가리키는 어휘가 아주 많다면서 언어분화와 지역적 문화와 환경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눈(snow)을 지칭하는 영어 어휘는 아주 단순하고 빈약하지만 이누이트어에는 최소한 네 종류가 있다고 했다. 카나qana(내리는 눈), 피크시르포크piqsirpoq(떠다니는 눈), 키무크수크qimugsug(이미 떠 있는눈), 아푸트sput(땅 위에 쌓여있는 눈)와 같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고 했다. 눈이 내리지 않은 열대 지역에서는 어휘와 대상이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해당하는 어휘는 있다고 하더라도 추상적일 뿐이다. 눈을 지칭하는 어휘가 수 십가지라는 주장은 신뢰성이 없는 엉터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물리적 현상을 서술하는 방식이 개별 나라마다 다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어휘의 다양한 변이가 일부 진영에서 간과된 이유는 이누이트어의 눈을 둘러싼 과장된 주장들, 쉽게 논파할 수 있는 그런 주장들 때문이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영어로 칼로 ‘쓸다‘는 cut 정도이지만 한국어에는 ‘쓸다, 자르다, 깎다, 오리다, 저미다‘ 등 무려 48가지에 이른다. 대장금의 요리솜씨에서 칼을 다루는 어휘가 그만큼 풍족하다는 말이다. 영어로 put on ㅡput off에 대응되는 한국어는 “입다, 끼다, 신다, 걸치다”ㅡ“벗다”와 대응하여 put on은 한국어에서는 매우 다양한 분화양상을 보여주지만 put off는 ‘벗다‘ 하나 밖에 없다.

언어 다양성을 일축하는 태도가 전 세계 언어 연구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표준어나 RP 공통어라는 규제를 통해 언어의 번식을 막아, 분열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사실은 이 거창한 문제는 차치하고 '어떤 언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어휘가 한없이 많다'라는 과장된 통념에 대해 술한 논쟁과 해석이 뒤따랐다. 이 논쟁은 대부분 핵심을 놓쳤다. 그 핵심이란 보아스의 사례가 잘 보여주는 간단한 논점으로, 언어의 진화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눈'을 지칭하는 세분화된 어휘가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부족은 눈을 전혀 모르며 눈을 가리키는 다양한 어휘는 고사하고 기본 어휘조차 전혀 필요하지 않다.

어휘를 문법에 따라 배열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쓰는 언어라고 생각했고 또 그 어휘 배열의 방식을 문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인공지능 번역을 주도하는 거대언어 모형(LLM)은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대규모 클라우드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구문문법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더 정확한 관점이라면 지금의 인공지능 연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 다양성이 입증되고 인간 언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인공지능을 통해 검증되고 있는 지금, 도리어 언어는 가장 큰 위기 를 맞고 있다. 종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도 시시각각 소멸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21 세기가 지나면 전 세계 언어들 중에서 600개만 살아 남을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와 방언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언어 진화가 중단되고 지식정보의 퇴보가 시작될 것이다. 언어 소멸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언어의 획일화다. 일반인공지능AGI시대는 새로운 지식정보의 자연언어로 획일화된 언어식민화 지배 시대로 진입된다. 플렛폼과 자연언어 처리를 지배하는 지식정보 제국주의의 탄생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언어의 다양한 변종들의 무질서를 제국의 권력으로 바꾸는 시대다. 언어다양성의 데이타를 다층적 신경망의 섬세함이 국가 경쟁의 승자를 결정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어의 생산자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 이었으나 이제는 극소수의 플렛폼이 지배하는 인공지능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말과 글을 산출하고 새롭게 믹싱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언어가 빅데이터에 다시 포함되어 언어 학습에 쓰이면서 언어가 닫힌계로 바뀌게 된다. 닫힌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즉 언어는 점점 무질서해질 것이다. 감성이 표백된 자연 인공언어, 지역적 토속적 감정은 매말라 비틀어질 것이다. 지구가 닫힌계가 아닌 이유는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듯이 인간 언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기계가 아닌 몸을 가진 인간이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에피스테메로 이루어진 언어를 발전시키며 살아온 인간만이 언어의 획일화에 맞설 수 있다. 그래서 지역의 방언, 지역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방언을 보존해야 한다. 한국어는 국립국어원에서 관리 규정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과 “표준어”라는 한국어 어문 규정을 가진 매우 일관된 언어다. 의사소통의 분열을 막기 위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다. 같은 생각을 같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효율적 검색을 위해서도 언어의 표준화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표준화'는 왠지 한국어를 한가지로 고착시키려는 '화석화'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언어의 변화에는 반드시 다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죽었다'라고 말한다. 한국어가 더 이상 시들하게 죽지 않고 다양해지길,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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