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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양삼일] 21세기 디지털 '엘 풀포'의 귀환...바나나 회사에서 플랫폼 기업까지, 기업 권력이 국가를 압박하는 방식

  • 콜롬비아=양삼일 기자
  • 입력 2026.06.0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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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ited Fruit Company(UFCO)에 의한 원주민 토지 강탈 사진

 

[콜롬비아=양삼일 기자]

 

1. 택배 앱과 워싱턴 로비스트

 

2026년 1월, 워싱턴 백악관.
미국 부통령이 한국 총리에게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쿠팡.

쿠팡은 수백만 명의 개인 신용정보를 유출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나섰다. 절차는 정당했다. 그러나 쿠팡은 한국 법에 응답하는 대신, 워싱턴을 움직였다. 백악관과 부통령실 출신 전관들이 로비스트로 투입됐다. 단기간에 집행된 로비 자금은 100만 달러를 넘었다.
기업의 법적 과실은 순식간에 외교 문제로 변환됐다. 사법의 문제가 외교의 언어로 번역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Mark Twain은 말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그 리듬은 반복된다.”

쿠팡의 로비는 불법이 아니다. 미국에서 로비는 헌법이 보장하는 합법적 정치 행위다.
전관을 고용하고, 의원실을 방문하고, 행정부에 의견을 전달하는 것. 이는 일상적인 절차다.

문제는 그 ‘합법적 압력’이, 다른 나라의 법과 사법 절차를 흔들기 시작할 때다.
그리고 이 방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70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2. 엘 풀포(문어): 권력을 붙잡는 방식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
마야 문명의 심장부였고, 세계적인 커피 산지다. 이 나라는 1944년부터 1954년까지, 단 10년 동안 ‘봄’을 경험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이 시기를 ‘과테말라의 봄(La Primavera Guatemalteca)’이라 부른다. 그 봄을 꺾은 것은 총이 아니라, 한 기업의 로비였다.

 

20세기 초,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중앙아메리카를 장악했다.
바나나 농장에서 시작해 철도, 항만, 전신망까지 확장했다.

이 기업은 국가보다 더 많은 땅을 가졌고, 더 많은 사람을 고용했으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여러 나라의 정부는 이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을 바꾸고, 자산을 넘겼다.

이 시대를 우리는 ‘바나나 공화국’이라 부른다. 국가가 기업의 하청이 된 시대였다.

 

과테말라 민중은 UFCO를 ‘엘 풀포(El Pulpo)’라 불렀다. 문어라는 뜻이다.

그 비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촉수는 인프라를 감싸고, 빨판은 권력에 달라붙는다.

철도와 항만, 통신망으로 국가를 포위하고 정치인·관료·사법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호르헤 우비코정권(1931~1944)은 이 구조를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UFCO에 토지를 무상 제공하고, 면세 혜택과 인프라 운영권까지 넘겼다.

노동자 착취는 법으로 보장됐고, 저항은 강제 노역으로 억눌렸다.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 외국 자본의 이익을 관리하는 대리인이 됐다.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 축출을 시도한 과테말라 반군들,총기는 CIA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모나신강 소총

 

1944년, 혁명이 이 체제를 무너뜨렸다. 주도 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군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근대화를 꿈꾼 지식인이었다.
농민이 생산의 주체가 되어야 시장이 생기고, 시장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51년, 하코보 아르벤스가 집권했다. 그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유휴지를 정부가 매입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방식.
공산주의 몰수가 아니라, 법과 보상을 기반으로 한 개혁이었다.

 

문제는 대상이었다.

UFCO는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면서도, 세금을 줄이기 위해 가치를 축소 신고해왔다.
아르벤스는 그 지점을 파고들었다. “당신들이 신고한 가격으로 사겠다.” 탈세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UFCO는 즉각 반격했다. 합법적 개혁은 ‘공산주의 위협’으로 재포장됐다.

당시 미국 권력 핵심에는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앨런 덜레스 형제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UFCO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기업의 이익은 곧 안보 문제가 되었고, 1954년, CIA가 개입한 쿠데타로 정권은 붕괴됐다.

 

과테말라의 봄은 10년 만에 끝났다. 이후 36년의 내전이 이어졌다.

짧았던 봄의 가치는, 그 뒤의 긴 겨울이 증명한다.

 

 

3. 2026년, 같은 리듬

 

70년이 지났다. 바나나는 플랫폼이 되었고, 철도는 물류망이 되었다. 엘 풀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장을 입고, 디지털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쿠팡과 UFCO는 동일하지 않다. 오늘의 로비는 합법이고, 쿠데타는 아니다.

그러나 구조는 닮아 있다. 기업의 사법 리스크가 외교 문제로 전환되는 방식, 자국 정치력을 활용해 타국 규제를 압박하는 방식, 특정 기업 문제를 동맹과 관세 프레임 뒤에 숨기는 방식, 리듬이 반복된다.

 

70년 전엔 ‘공산주의 위협’이 있었고, 지금은 ‘동맹 우려’와 ‘관세 보복’이 있다.

표현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다. 밖에서는 외교로 압박하고, 안에서는 이념으로 흔든다.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감정이다.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핵심은 세 가지다. 배상, 제도, 그리고 규칙.

‘실질적 피해 보상’, ‘개인정보 보호 체계 강화’, ‘글로벌 기업의 국내 법 준수’

 

이를 위해서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에서 로비는 예외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 불편한 현실을 인정해야 대응도 가능하다.

 

2026년의 한국은 1954년의 과테말라가 아니다. 그때 민중은 정보가 없었다.
지금 소비자는 모든 것을 안다. 그 ‘앎’ 자체가 권력이다.

 

앱을 삭제하는 행위는 하나의 정치다. 소비자의 선택은 외교보다 강력할 수 있다.

글로벌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다.

 

주권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과거 누군가가 지키려 했던 그것을, 이제는 소비자의 선택으로 증명해야 한다.

 

엘 풀포는 돌아왔다. 촉수로 구조를 감싸고, 빨판처럼 권력에 달라붙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우리는 그 움직임을, 이미 알고 있다. [콜롬비아=양삼일 세종학당장]

 

양삼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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