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양삼일 15] 중남미 리더십의 심리 코드 (2) : 이미 죽은 영웅이 어떻게 산 사람의 권력을 지탱하는가
[콜롬비아=양삼일의 중남미 시선 15] 베네수엘라 북서부 야라쿠이(Yaracuy)주. 카라카스에서 차로 네 시간 거리에 있는 이 지역은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신령한 땅으로 여겨온 곳이다. 그 중심에 소르테(Sorte) 산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무속 신앙의 본산인 계룡산이나 마이산 같은 곳. 아니, 더 정확하게는 소원을 빌러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대구의 팔공산 같은 곳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퍼진 신앙이 마리아 리온사(María Lionza)다. 원주민 신앙에 가톨릭과 아프리카 토속 신앙이 뒤섞인 베네수엘라 고유의 민간 신앙이다. 베네수엘라 인구의 약 30%가 신자이고, 60%는 살면서 한 번쯤 이 산을 찾았다고 한다. 대통령부터 빈민가 주민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그 소르테 산에는 연중 내내 신자들이 찾아온다. 밤이면 북소리가 울리고 향 연기가 산을 덮는다. 그리고 해마다 10월 12일, 스페인 식민 지배에 맞선 '원주민 저항의 날'이 되면 전국에서 수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절정에 달한다. 영화 ‘파묘’에서 김고은이 보여준 그 장면처럼, 향 연기가 자욱한 제단 앞에서 무당(영매)이 몸을 떨기 시작한다. 처음엔 손끝이 떨린다. 이내 어깨가 들썩이고, 눈동자가 뒤집힌다.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잠시 후 무당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2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목소리다.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스페인 식민 지배를 무너뜨리고 6개국(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을 해방시킨 전설적인 영웅. 볼리비아는 아예 그의 이름을 딴 나라다. 그 볼리바르가 무당의 몸을 빌려 강림하는 것이다. 무당의 목에서 갑자기 쉰 소리가 새어 나온다. 한 번, 두 번. 마른기침이 이어진다. 볼리바르가 생전에 앓던 바로 그 결핵의 기침이다. 제단 앞에 모인 사람들은 술렁인다. 어릴 적부터 전설처럼 들어온 그 기침 소리. 의심할 틈도 없다. 하나둘 무릎을 꿇는다.
200년을 넘어 그가 돌아온 것이다.
죽은 영웅이 더 강하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1973년 퓰리처상을 받은 책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이렇게 썼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을 끊임없이 사로잡는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본질적으로 그 공포를 피하려는 몸부림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못 견딘다. 그래서 죽지 않을 무언가에 달라붙으려 한다. 영웅이 딱 그 역할이다. 베커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집단은 영원하고 싶다는 충동을 갖는다. 그 충동이 영웅을 만들고, 영웅을 기억하고, 영웅을 불러낸다."
살아있는 대통령은 실망을 준다. 예외가 없다. 취임할 때의 환호는 퇴임할 때쯤 되면 어김없이 한숨으로 변한다. 그러나 죽은 영웅은 실망을 주지 않는다. 죽었으니까.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해진다. 베네수엘라 민간 신앙 안에서 볼리바르는 이미 신이다. 살아있는 대통령보다 훨씬 높은 권위를 가진 존재다.
바로 이 지점을 차베스(Hugo Chávez)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볼리바르의 목소리를 듣는다"
1999년 대통령에 취임한 차베스는 첫날부터 볼리바르를 꺼내들었다. 국가 공식 명칭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ú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으로 바꿨다. 자신의 혁명을 '볼리바르 혁명'이라 불렀다. 그리고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볼리바르는 죽지 않았다. 그는 우리 안에 살아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차베스는 암 투병 중에 자신의 고통을 볼리바르의 결핵 기침과 동일시했다. "나는 볼리바르처럼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볼리바르처럼 이겨낼 것이다." 심지어 2010년에는 볼리바르의 유해를 직접 발굴해 사인을 재조사하도록 명령했다. 독살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정적들을 200년 전 볼리바르의 적과 동일시한 것이다.
대중은 열광했다. 비판이 사라졌다. 차베스에 대한 반대는 그에게 강림한 건국 영웅 볼리바르에 대한 배신이 되니까.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 말기. 나라가 기울어가던 그 시절. 고종과 명성황후의 곁에 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조선 말기 최고 권력자들의 비선 실세였다. 본명조차 기록마다 다르다. 그냥 무당이다.
그녀는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 했다. 삼국지의 그 관우, 촉나라 장수다. 중국 촉나라 장수가 어떻게 조선 무당의 아버지가 됐는지는 묻지 말자. 놀라운 것은 고종 스스로도 관우의 현몽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직접 북묘 비문에 이렇게 썼다. "어느 날 관우 장군이 나의 꿈속에 현몽하고 또 왕비의 꿈에도 현몽했다." 그 비석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소르테 산의 무당이 볼리바르의 영을 받듯, 진령군은 죽은 영웅의 권위를 빌렸다. 국경도, 시대도 상관없었다. 죽은 영웅이면 됐다. 진령군은 경복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관찰사와 사또 임명까지 그녀의 말 한마디에 결정됐다. 향 연기 속에서 신의 뜻이 내려왔고, 그 뜻이 나라의 방향을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괴승 라스푸틴(Rasputin)이 황태자의 혈우병을 고쳐준다며 황실에 들어와 비선 실세가 됐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 없이는 하루도 못 버텼다.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두 달 후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 조선도, 러시아도, 결말은 같았다.
그러나 신통력은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결국 1895년 일본 자객의 칼에 암살됐고, 고종은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 리더가 사술에 영혼을 저당 잡히면 역사는 언제나 같은 결말을 보여준다.
소르테 산의 제단과 경복궁의 굿판. 시대도 다르고 대륙도 다르다. 그런데 구조가 똑같다. 리더가 불안할수록 무당을 찾는다. 무당이 권력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라의 중심이 흔들린다. 공식 회의실이 아니라 향 연기 자욱한 밀실에서 국가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주 동해 앞바다.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바닷가에서도 오늘 누군가 기도를 올린다. 그 바위 속에 잠든 왕의 신기를 받겠다는 것이다. 소르테 산이든, 경복궁이든, 경주 바닷가든. 죽은 영웅을 불러내는 인간의 욕망은 어디나 같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볼리바르가 원한 것과 차베스가 만든 것
베커는 이것을 '불멸 프로젝트(Immortality Project)'라고 불렀다. 죽음이 두려운 리더가 자신보다 큰 무언가에 달라붙는 것. 볼리바르라는 거대한 신화 뒤에 숨는 순간, 리더의 실패는 보이지 않게 된다.
차베스는 결국 2013년 암으로 죽었다. 그가 남긴 것은 볼리바르의 꿈이 아니었다. 극심한 경제 붕괴, 수백만 명의 난민, 그리고 후계자 마두로(Nicolás Maduro)였다. 마두로는 차베스의 유산을 이어받아 볼리바르를 계속 불러댔다. 그러나 2026년 1월, 미군 특수부대가 카라카스 침실에서 그를 잠든 채로 체포해 뉴욕 법정에 세웠다. 200년 전 볼리바르가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킨 그 땅에서, 볼리바르의 이름을 팔던 리더가 미군의 수갑을 찼다.
볼리바르가 원했던 것은 해방이었다. 그러나 정작 차베스와 마두로가 무당과 함께 죽은 볼리바르의 영을 불러내어 만든 것은 또 다른 감옥이었다.
죽은 영웅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리더는 결국 산 자들의 미래를 과거의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어떤 신통력도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이제 안다. 조선이 그랬고, 로마노프 왕조가 그랬듯이. 죽은 볼리바르의 영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소르테 산의 무당은 오늘 밤도 결핵 기침을 하며 볼리바르를 불러낼 것이다.
그러나 신은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 [콜롬비아=양삼일 세종학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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