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상의 달인인가, 아니면 정치적 진중함의 도살자인가?
현대 미국 정치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만큼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치를 끈질기게 거스른 인물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정치경력 전반에 걸쳐 공론의 장에서 지켜져야 할 정치적 품위를 꾸준히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해 왔다. 정체되지 않은 정치 발언이나 정책을 발표한 후 수시로 수정 혹은 철회하면서 모순적 상황을 유발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감은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과 말 바꾸기 패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습관적이다. 이 점에서 트럼프는 현대 정치 리더십에서 비일관성과 경박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 되고 있다.
자신을 향한 비판에 직면했을 때, 트럼프가 논리적이거나 사실에 기반한 반박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그는 이러한 비판을 '가짜 뉴스' 라고 묵살하거나, 정적들의 소행으로 돌리며, 특히 민주당내 급진 분자들의 음모로 싸잡아 매도한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방어적인 데 그치지 않고 공격적인 전환국면, 특히 자신의 지지층의 역동원을 위해 사용된다. 정치 지도자에게 부과되는 평가체계를 외면 혹은 거부함으로써, 트럼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행사되는 정치적 책임의 기본틀 자체를 해체하려 시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보여준 변덕스런 언행의 일상화가 초래한 사회적 결과이다. 변덕의 반복은 이를 직면하는 대상들의 둔감함으로 이어진다. 언론 기관과 대중 모두 그의 변덕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점차 무감각해진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러한 피로감이 사회적으로 확장될수록 변덕의 당사자에 대한 검증의 문턱은 낮아진다는 점이다. 대중이 지도자의 언어적 변동성에 익숙해질 때, 지도자의 말이 신뢰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기대감도 함께 붕괴된다. 문제는 한 귀로 들어와서 바로 다른 귀로 흘려지는 지도자의 언어는 더 이상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내부 역학은 트럼프의 언행 패턴을 강화하는데 일조한다. 그의 측근 그룹 내에서는 정제된 숙의보다는 충성심, 동조, 헌신을 우선시하는 조직 문화가 작동하고 있다. 내각의 각료들은 솔직하고 전문적인 조언을 제공하기보다는 대통령의 의견에 긍정적으로 동조하도록 유인된다. 이러한 집단 문화는 행정부 내의 시스템적 견제 기능을 저해하는 동시에, 사유화된 준(準)군주제 시스템을 닮은 트럼프의 리더십 스타일을 조장한다. 그리고 이는 권력에 대한 접근성이 전문성이 아닌 단순 맹종에 의존하는 '왕의 게임(King’s game)'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시스템적 일탈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트럼프의 정치적 주도력은 꽤나 놀라운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다. 미국 유권자의 약 3분의 1은, 비록 그 수치가 점진적인 하락세를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 지지자에게 있어서 트럼프의 직설적이면서도 변덕적인 수사는 기존의 구조화된 미국의 정치틀을 뒤흔드는 참신한 시도이자 트럼프가 지닌 개인적 솔직함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예측 불가능성은 전략적 모호성, 즉 협상의 의도적 수단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그의 모순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더 큰 전략 게임 내에서의 계산된 책략이 된다.
트럼프는 변덕스러운 인물이 아니라 적응력이 뛰어난 인물이고, 일관성이 없는 인물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기회를 포착하는 인물로 포장된다. 그는 더 높은 전략적 차원에서 행위하는 뛰어난 협상의 달인으로 자리매김된다. 그간 우리 일부 언론들이 트럼프의 비일관성을 경제인 출신인 그가 가진 특출난 협상의 기술로 미화해 왔던 것 또한 동일한 맥락의 결과이다.
트럼프에 대한 긍정적 재포장 시도가 광범위한 반박에 직면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수사적 및 정책적 변동성이 간혹 전술적으로 유리한 기회를 이끌어낼 수는 있겠지만, 효과적인 국정 운영을 지속시킬 수는 없다. 예측 불가능성이 주는 단기적인 이득은 신뢰성 하락이라는 장기적인 대가에 의해 금방 빛이 바랠 수 있다. 자신의 발언이 신뢰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지 못하는 협상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협상 지위를 스스로 상실하게 된다. 국가 지도자의 신뢰성이 지속적으로 추락할 때 국내적 권위와 국제적 위상 모두 약화되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수사적 및 정책적 변동성은 자산이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것의 궁극적인 대가는 지도자가 수반해야 할 정치적 진중함의 붕괴이다. 정치적 진중함은 단순히 리더십의 개인적인 덕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치에 있어서 제도적인 필수 요소이다. 지도자들이 정치적 진중함의 수행이 아니라 이를 포기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민주주의 시스템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트럼프에 대한 평가 결론은 명확하다. 그는 협상의 달인이라는 세간의 일부 평가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는 정치적 진중함의 도살자로, 향후 미국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위험한 지도자의 선례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 장의관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석사,행정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와 국립통일교육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 전공분야인 '정치이론'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 저술이 있으며, 일반인을 위한 인문교양 저서로는 『대통령의 탄생: 우리가 몰랐던 민주적 대통령제 바로 알기』, 『흥부의 딜레마: 흥부전과 사회철학의 만남』, 『생각하는 사회: 사회를 만나는 철학 강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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