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롬비아=양삼일의 중남미 시선 13]
1. 요즘 아침이 조금 달라졌다. 디스크가 말썽을 부려 줄넘기를 줄이고, 걷는 시간도 반으로 줄였다. 몸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짧아진 아침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몸이 조금 불편하니까 오히려 “나 지금 살아 있구나” 하는 감각이 또렷해진다.
며칠 전 ITM에서 메데진 문화국장 감사패 수여식이 열리기 전, 알레한드로 비야 총장과 안티오키아 출신 작가 다비드 베탄쿠르의 대담이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자리한 천막 쪽을 바라보며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아 둘러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그늘보다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
메데진은 분지다. 고급스러운 카페와 식당이 모여 있는 곳에 올라가면,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도심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특히 산비탈을 따라 펼쳐진 코무나(Comuna)들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빛으로 이어진다. 마치 산 위에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화려하다. 그 빛 아래에 있는 낮의 풍경, 고단한 일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유리창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이방인인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딘가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그건 사실이다.
커피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 소설이 떠올랐다. ‘마의 산’.
2.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3주만 머물다 가려던 알프스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런데 결국 7년을 머문다. 왜 그랬을까. 한 가지 이유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끝없는 논쟁, 사랑, 그리고 죽음의 기척. 그 모든 것이 그를 붙잡았다.
요양원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세템브리니는 “이성과 진보를 믿으라”고 말했고, 나프타는 “그건 환상이다”라고 받아쳤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친다. 하지만 한스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다. 듣고, 흔들리고, 다시 듣는다.
나는 ITM 강당에서 강의를 하다가 그 장면이 떠올랐다. 학생들 얼굴에서 한스와 비슷한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맞아, 그런데…”라고 말할 것 같은 얼굴. 정답을 원하면서도, 정답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얼굴.
우리도 그렇게 산다. 확신과 의심 사이를 오가면서.
3.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조금 다르다. 그는 84일째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늙은 어부다. 사람들은 그를 재수 없는 노인이라 부른다. 그래도 그는 다음 날 또 바다로 나간다.
결국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3일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하지만 항구로 돌아올 즈음에는 상어 떼에게 거의 다 뜯기고, 뼈만 남는다.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결과가 없어도 버티는 것. 그게 품위다. 거창한 말 같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디스크가 말썽이어도 짧게라도 걷는 것. 행사 준비가 뜻대로 되지 않아도 다음 날 다시 조직위에 연락하는 것. 그런 것들이다.

4. 씻김굿을 처음 제대로 이해한 건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였다.
그 전까지 나는 씻김굿을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장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제삿날이면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른들은 상을 차리고 절을 하고 촛불을 태웠다. 어린 마음에 늘 의문이 남았다. 돌아가신 분이 이걸 알기나 할까.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죽은 이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다루는 방식이 아닐까.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소설을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씻김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 무게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그래도 다시 살아보자”고 말하는 과정이다. 죽은 자를 위한 의례가 아니라, 남은 자의 선택이다.
메데진도 그런 도시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곳. 그 도시가 지금은 책과 예술의 축제를 연다. 씻김굿이 그 무대를 여는 것이, 단순한 연출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5.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시지프스를 이야기한다. 신의 벌을 받아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인간.
정상에 닿으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고, 그는 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카뮈는 말한다. “시지프스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왜 그럴까. 바위를 미는 그 순간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굴러떨어질 걸 알면서도, 또다시 어깨를 밀어 넣는 그 선택이 운명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번 도서전이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메데진의 사람들과 한국의 작가들이 서로의 바위를 이야기하는 자리. “당신도 그렇게 밀고 있었구나” 하고 확인하는 자리.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또 올라갈 것이다.
그 발걸음 위에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될 테니까. [콜롬비아=양삼일 세종학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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