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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햇살은 창가에 머무는데...봄날 오후 창가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행복...고대의 괴물과 현대의 괴물은 어디있나? 호모 캡티부스...

  • 김한식 기자
  • 입력 2026.04.22 16:26
  • 글자크기설정

김한식.png

 

    햇살은 창가에 머무는데

                     

                             - 김한식 - 

 

창가에는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고

 

찻잔마다

 

가느다란 김이 오른다

 

세 사람의 청춘이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만 한

 

푸른 화면을 들여다본다

 

손가락은 쉼 없이 움직이지만

 

마음은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침묵은 와이파이를 타고 흐른다

 

미지의 농담에 키득거리며

 

낯선 얼굴의 슬픔에

 

두터운 엄지를 누르면서도

 

정작 눈앞에 앉은 사람의 떨림은

 

아무도 읽어내지 못한다

 

창밖의 나무는 산들산들

 

바람의 문장을 쓰고

 

하오의 밝은 햇살은 젊은 이마 위에

 

조용한 축복을 얹어 주었으나

 

그들은 고개 숙인 제사장처럼

 

화면의 신전 앞에 머문다

 

고대의 괴물들은

 

바다와 산속에 숨어 살았으나

 

현대의 괴물은

 

주머니 속에서 빛난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호모 캡티부스(Homo Captivus)

 

자유를 발명하고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자들

 

속도를 숭배하며

 

방향을 잃어버린 자들

 

빛을 손에 쥐었으나

 

마음의 등불은 꺼져가는 자들

 

눈은 빛을 향하고 있으나

 

영혼은 어두워지는

 

동굴의 후예들

 

언젠가 저들 중 한 사람이

 

문득 화면을 끄고

 

사람의 눈을 오래 바라보는 날

 

멸종 직전의 언어 하나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리라

 

그 이름은 사랑,

 

필로소피아(Philosophia)다

 

<해설> - 연결의 시대에 인간은 왜 더 멀어졌는가 -

 

김한식 시인의 「햇살은 창가에 머무는데」는 현대 문명의 가장 익숙한 장면 하나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깊은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묵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 시의 배경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봄날 오후, 창가에 햇살이 내려앉고 찻잔마다 김이 오르는 평화로운 카페의 풍경입니다. 모든 것이 따뜻하고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평온한 장면 속에서 현대 문명의 균열을 발견합니다. 세 사람의 청춘이 한자리에 마주 앉아 있으나,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각자의 화면 속으로 침잠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날카로운 이유는 거대한 재난이나 극단적 비극을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매일 보는 너무도 평범한 풍경 속에서 시대의 비극을 포착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전쟁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무감각 속에서도 서서히 붕괴됩니다. 함께 있으나 함께하지 못하는 상태, 가까이 있으나 서로 닿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현대인의 새로운 고독입니다.

 

시인은 “손가락은 쉼 없이 움직이지만 / 마음은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 행은 오늘의 문명을 압축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기술은 인간의 손을 놀랍도록 민첩하게 만들었습니다. 클릭하고, 넘기고, 연결하고, 반응하는 속도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더디고 메말라졌습니다. 손은 세계와 연결되었으나, 마음은 옆 사람에게조차 닿지 못합니다. 

 

문명의 발전이 반드시 관계의 성숙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정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구절,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 침묵은 와이파이를 타고 흐른다”는 이 시대 언어의 몰락을 보여 줍니다. 본래 말은 인간이 서로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만든 가장 고귀한 다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은 대화가 아니라 정보가 되었고, 공감이 아니라 반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이 말하지만, 정작 깊은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역설을 “태어나지 못한 말”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언어는 넘치지만 참된 말은 부재합니다.

 

또한 시는 현대인의 감정 소비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미지의 농담에 키득거리며 / 낯선 얼굴의 슬픔에 두터운 엄지를 누르면서도 / 정작 눈앞에 앉은 사람의 떨림은 / 아무도 읽어내지 못한다.” 여기서 ‘두터운 엄지’는 단순한 손가락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감정 기호입니다. 우리는 먼 타인의 비극에 즉각 반응하고, 세계 곳곳의 뉴스에 분노하거나 슬퍼합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 떨림, 침묵은 읽지 못합니다. 이것은 감정의 확장이 아니라 감정의 추상화입니다. 인간은 더 넓게 반응하지만, 더 깊게 느끼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의 중반부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마지막 경고처럼 등장합니다. “창밖의 나무는 산들산들 / 바람의 문장을 쓰고 / 하오의 밝은 햇살은 젊은 이마 위에 / 조용한 축복을 얹어 주었으나.” 자연은 여전히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바람은 문장을 쓰고, 햇살은 축복을 건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개 숙인 채 “화면의 신전 앞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는 단순한 생활 비판을 넘어 문명 비판의 차원으로 올라섭니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신전’이 됩니다. 인간은 정보를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보 앞에 경배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기술은 도구여야 했으나, 어느새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현대인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른 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속도, 효율, 자극, 즉각성의 신 말입니다.

 

이어지는 “고대의 괴물들은 / 바다와 산속에 숨어 살았으나 / 현대의 괴물은 / 주머니 속에서 빛난다”는 구절은 이 시의 가장 강렬한 문명 비판입니다. 과거의 괴물은 외부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것과 싸우거나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괴물은 손안에 있습니다. 늘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 꺼내 들고, 기꺼이 응시합니다. 현대 문명의 위험은 적이 밖에 있지 않고 욕망의 형태로 내면화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이 명명한 호모 캡티부스(Homo Captivus)는 탁월한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스마트폰 중독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외치지만 스스로를 속박하는 인간, 속도를 숭배하지만 방향을 잃은 인간, 빛을 손에 쥐었으나 마음의 등불은 꺼져 가는 인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기술 문명은 인간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주었으나, 정작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결되었으나 방황하고, 풍요로우나 공허합니다.

 

특히 “동굴의 후예들”이라는 표현은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현대적으로 소환합니다. 고대의 인간이 동굴 벽의 그림자를 현실로 착각했다면, 오늘의 인간은 화면 속 이미지와 알고리즘이 구성한 세계를 현실로 착각합니다. 화면은 창문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새로운 동굴의 벽이 됩니다. 우리는 바깥세계를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정교하게 편집된 그림자를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가 단순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마지막 연에 있습니다. “언젠가 저들 중 한 사람이 / 문득 화면을 끄고 / 사람의 눈을 오래 바라보는 날.” 구원은 거대한 혁명으로 오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이 화면을 끄고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작은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기술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날 돌아올 언어의 이름은 사랑이며, 필로소피아라고. 이는 매우 깊은 선언입니다. 사랑은 타인을 목적이 아닌 존재로 바라보는 힘이며, 철학은 익숙한 세계를 다시 묻는 용기입니다. 결국 인간 회복의 길은 사랑과 철학, 곧 타인을 향한 마음과 자신을 성찰하는 사유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햇살은 창가에 머무는데」는 스마트폰을 비난하는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기술을 다루는 인간이 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시입니다. 햇살은 여전히 창가에 머물고, 바람은 여전히 문장을 쓰며,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축복을 건네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개를 들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화면만 보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각자의 고독 속에 접속해 있을 뿐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다시 사람의 눈을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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