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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양삼일의 중남미 시선8] 멀리 콜롬비아에서 만난 춘향이...사는 동네와 출신 학교는...

  • 콜롬비아 양삼일 기자
  • 입력 2026.04.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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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1.jpg
콜롬비아 제2의 도시인 메데진에서 열린 국제번역전

[콜롬비아=양삼일] 멀리 남미 콜롬비아에서 춘향전을 번역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굿리더뉴스 필진인 양삼일 보고타 세종학당장이 현지에서 겪은 '춘향이론'을 전해준다. [편집자주]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진에서 춘향전을 번역하며..

 

콜롬비아(국제 번역전)에서 춘향전을 번역을 하다가 손이 멈춘 적이 있다.

형장을 맞으면서도 춘향이 한 줄씩 말을 이어가는 장면이었다. 


첫째 매 앞에서는 "일부종사", 둘째 매 앞에서는 "이도령 못 잊겠소", 셋째, 넷째, 다섯 번째. 숫자가 붙은 고통 앞에서 그녀는 매번 다른 말로 버텼다. 아프다는 말 대신에.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기생의 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신분에도 불구하고 글과 음악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언어가 있는 사람은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고, 고통 앞에서도 문장을 잃지 않는다. 춘향이 사또의 명을 거부한 건 고집이 아니었다. 언어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거부였다.


콜롬비아에서는 두 가지를 물어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어디 사니?"와 "어느 학교 나왔니?" 이 두 질문이면 충분하다. 동네 주소가 나오고, 사립인지 공립인지가 나오면, 그 사람이 어느 세계에서 왔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보고타와 메데진, 칼리, 카르타헤나, 콜롬비아 모든 도시가 같다. strata 1부터 6까지 숫자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것이 동네의 이름이고, 학교의 이름이고, 미래의 이름이다. 공중전화 요금까지 국가 보조를 받는 strata 1에서, 마이애미 물가와 맞먹는 strata 6까지.


보고타의 엘리트 사립대학 등록금은 한국 대학보다 비싸다. 외국계 사립 초중고는 돈이 있어도 부모가 먼저 인터뷰를 통과해야 한다. 자식의 입학이 아니라 부모의 신분을 심사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받은 번호를 자식에게 물려주거나, 아니면 그 번호를 바꾸려고 평생을 싸우거나. 콜롬비아에서 계층은 선택이 아니다. 


공기처럼 몸에 배어 있다.


조선의 신분제가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 구조 안에서 한 가지는 가끔 경계를 넘는다. 글과 음악이다. 판소리가 그랬다. 한 소리꾼이 양반의 언어와 민중의 언어를 함께 목에 넣고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카리브 해안의 바예나토가 그랬다.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시작한 리듬이 콜롬비아 전체의 말이 됐다. 문화는 신분증을 묻지 않는다.


암행어사 이몽룡이 사또의 생일잔치에서 시 한 줄을 썼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그는 칼을 뽑지 않았다. 잔칫상 앞에서 언어로 물었다. 이 술과 고기는 누구의 피와 눈물로 차린 것인가. 그 한 줄이 사또를 무너뜨렸다. 


권력의 정당성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아래에서 묻는 질문이 그것을 세우고 무너뜨린다.

 

콜롬비아 2.jpg
상류층이 다니는 콜롬비아의 영국계 고등학교

 

지금 한국에서 언어를 독점하는 건 누구인가.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쥔다. 


무엇을 죄로 규정할지, 누구를 법정에 세울지를 한 기관이 결정한다. 조선의 사또가 행정과 사법과 통치를 혼자 쥐었던 구조와 다르지 않다. 물론 강한 수사권이 부패를 막는 데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권력을 누가, 어떻게 통제하느냐다.


그래서 이 질문은 지금 한국에서도 다시 던져지고 있다.


광장에서 수백만이 든 촛불도 같은 질문이었다. 탄핵도 그 연장이었다.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춘향전은 그 질문을 수백 년 전에 이미 던졌다.


9월, 우리 재단은 메데진 국제도서전에 이 책을 가져간다.

 

누가 집어들지 모른다. strata 1에서 온 독자일 수도 있고, strata 6에서 온 독자일 수도 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묻지 않고 건네는 책이다. 스페인어로 옮긴 춘향이의 말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번역하다 손이 멈췄던 그 장면을 나는 끝내 스페인어로 옮겼다. 형장을 맞으면서도 말을 잃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를. 언어로 버텼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춘향전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언어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콜롬비아=양삼일 세종학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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