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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벚꽃아래서 패를 던져라..인생의 덧없음속에서 느끼는 봄밤의 철학...

  • 김한식 기자
  • 입력 2026.04.0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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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1-1.jpeg

 

 호모 루덴스, 나가리판이다

- 김한식 -

봄빛이 숨결처럼 번지던

달밝은 밤

한 올의 실바람에도

꽃잎은 말없이 흘러내린다

그 흩어짐의 결 사이로

우리 세 사람은

조용히

탁자 앞에 마주 앉는다

패를 섞는 손끝 위로

하얀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고

봄밤의 서늘한 향기는

가슴 깊이 물결을 일으킨다

패 한 장을 펼칠 때마다

꽃잎을 들어올리는 바람처럼

마음도 살며시 흔들리고

패 한 장을 잃을 때면

꽃비 흩어지듯

희미한 체온이 내려앉는다

벚꽃 아래 봄을 노래하던

그 청청한 시절

우리는 마치 영원을 손에 쥔 듯

환한 웃음으로 피어났지만

바람은 시간을 지나가고

꽃들은 땅에 떨어지고

우리의 웃음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밤이 깊을수록

타오르는 고스톱의 열기

오늘의 판은 나가리다

패는 흩어지고

승부를 정하지 못한 채

남겨진 자리는

가벼운 침묵이 흐르고

흘러가며 비워진 자리에

서로의 온기만은

달빛처럼 천천히 차오른다

패도 꽃도 웃음도

꽃잎처럼 스러져가지만

따스한 온기만은

끝내 흩어지지 않고

토닥토닥

굽은 등허리에 머물러 있다

 

<해설> '덧없음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

김한식 시인의 「호모 루덴스, 나가리판이다」는 단순한 봄밤의 유희를 노래하는 시가 아닙니다. 나가르주나, 하이징아, 그리고 시인이 한 자리에 앉아 고스톱을 친다는 이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설정은 사실, 인간 존재의 심층을 비추는 하나의 철학적 장면입니다. 시가 그려내는 모든 이미지—벚꽃의 흩어짐, 달빛의 고요, 패를 펼치는 손끝의 떨림—은 유희의 순간을 넘어, 존재의 덧없음과 서로의 온기라는 마지막 남은 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시의 첫 부분에서 등장하는 “봄빛이 숨결처럼 번지던 달 밝은 밤”이라는 구절은 봄이라는 계절이 품고 있는 생명성과 그 생명성의 덧없음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벚꽃은 화려하게 피지만 바람 한 줄기에 “말없이 흘러내”립니다. 바로 이때 시인은 유희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탁자 앞에 앉은 세 사람—인간(시인), 놀이를 사유한 하이징아, 공(空)을 말한 나가르주나—이 조용히 패를 섞는 장면은 실제의 놀이가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에서 펼치고 거두는 모든 관계와 선택의 은유가 됩니다.

패를 펼칠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고, 패를 잃을 때마다 체온이 조용히 내려앉는다는 구절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기고 지는 순간보다, 그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의 결들 속에서 삶을 느낍니다. 이때의 흔들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이런 물음 속에서 유희는 단지 웃음의 장이 아니라 인간됨을 시험하는 장이 됩니다.

그러나 시는 곧바로 그 모든 환희를 뒤집습니다. 벚꽃 아래서 영원을 붙드는 듯 웃던 시절도, 청청했던 봄도, 결국은 바람과 함께 지나갑니다. 벚꽃은 떨어지고 웃음도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우리가 소중히 여겨온 기억들, 젊음, 욕망, 관계 역시 언젠가는 흩어집니다. 이때 나가르주나의 사상—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존재—가 시 안에서 은은히 살아납니다. 또한 하이징아가 말한 놀이의 본질, 즉 ‘진지함과 덧없음이 동시에 흐르는 인간적 행위’ 역시 조용히 몸을 드러냅니다. 결국 고스톱판은 “나가리”가 됩니다. 승부는 나지 않고, 판은 흩어지고, 남은 것은 가벼운 침묵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가리’의 순간, 시인은 아주 중요한 진실을 끌어올립니다. 패도 꽃도 웃음도 스러졌지만, 온기만은 남는다.

여기서 시가 말하는 온기는 단순한 체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줄 수 있는 존재의 진심입니다. 승부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관계가 드러나고, 패를 섞던 손끝을 비추던 달빛은 그 온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무너지고 지워지고 흩어지는 것들 속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함께 있었던 시간의 따뜻함, 서로를 향했던 마음의 결, 그리고 덧없음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고자 했던 조용한 손길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 “토닥 토닥 굽은 등허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그 온기가 어디에 닿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나이 들어 굽은 등허리의 외로운 삶을 쓰다듬고, 흩어지고 지는 존재를 다독이는 조용한 위로입니다. 시인은 유희의 한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깊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슬픔이 곧 서로를 살리는 온기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결국 이 시는 유희의 헛됨과 인생의 덧없음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남길 수 있는 한 조각의 따뜻함을 노래하는 봄밤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그 철학은 말하지 않지만 이렇게 속삭입니다.

승부가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꽃이 져도 온기는 남는다. 유희가 흩어져도 인간은 서로를 붙든다. 그 조용한 진실이, 벚꽃보다 오래 남아 시인의 손끝에서 달빛처럼 다시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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