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기로에 선 한국정치, 법정으로 망명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속 이 유명한 독백은 지금 한국 정치의 민낯을 떠오르게 한다. 오늘의 정치권에서 ‘상대’는 사라지고, 오직 쓰러뜨려야 할 ‘적’만 남았다. 정치는 더 이상 설득과 조정의 과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투가 됐다. 대화와 타협이 있어야 할 자리는 고소장과 고발장, 가처분 신청서가 대신하고 있다. 정치가 풀어야 할 갈등은 국회를 떠나 법정으로 향하고, 민주주의는 점점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 사법의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
최근 지방선거 공천을 둘러싼 풍경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선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는 일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공천 결과가 나오자마자 탈락한 예비후보들이 정당을 상대로 효력정지 가처분을 내고 법원으로 달려가는 일이 낯설지 않은 장면이 됐다. 후보의 자격과 정당의 전략적 판단이 유권자의 평가와 정치적 책임의 영역이 아니라 판사의 법리 판단에 기대어 흔들리는 현실이다. 정당이 스스로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법원의 결정을 정치의 출구처럼 여기는 순간, 정치는 이미 자기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를 두고 정치인들만 탓하기도 어렵다. 정치적 문제를 사법으로 끌고 가는 일이 이미 하나의 문화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상대를 정책과 비전으로 이기기보다 수사와 재판의 대상으로 몰아세우고, 정치적 반대자를 범죄자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는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고소, 고발, 수사의뢰, 특검이라는 단어가 정치를 설명하는 일상어가 됐다. 마주 앉아 조율하는 대신 법을 통한 응징이 앞서는 순간, 정치는 ‘공적 토론의 장’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의 기술’로 전락한다.
국회는 원래 그런 곳이 아니었다.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 수많은 회의실과 그 공간을 유지하는 막대한 세금은 그곳에서 민의를 부딪치고, 갈등을 토론하고, 끝내 접점을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회는 타협의 공간이라기보다 대결의 무대가 됐다. 고성은 넘치지만 설득은 부족하고, 결론을 자꾸 법원과 수사기관보고 해달라고 한다. 판결이 뜻에 맞지 않으면 판사를 공격하고, 사법부 수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최근에는 법왜곡죄 시행 이후 판사와 검사, 수사기관 책임자를 상대로 한 고발 사례까지 잇따르며 사법 영역마저 정치적 압박의 연장선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정치의 사법화는 중간지대를 지우는 정치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다. 양극단의 대립을 완충해야 할 중도 세력은 쉽게 변절자나 기회주의자로 몰린다. 국민 역시 거친 언사와 공격적인 전투력을 보여주는 정치인에게 더 빠르게 반응한다. 상대를 향한 독설이 ‘사이다’로 소비되는 동안, 정치는 조금씩 타협의 언어를 잃어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통쾌함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순간의 분노를 해소해주는 말은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결국 서로 다른 입장을 조정하는 인내에서 나온다.
사법부는 갈등의 최후 보루일 수는 있어도, 정치를 대신하는 상설 해결 기구일 수는 없다. 법원의 판결은 분쟁에 법적 결론을 내릴 수는 있지만, 정치가 감당해야 할 갈등까지 대신 봉합해주지는 못한다. 공동체를 다시 묶고,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함께 살아갈 길을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국회가 스스로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을 외면한 채 갈등의 해법을 법원과 수사기관에 떠넘기는 순간, 정치는 제 자리를 잃는다. 대화와 타협은 정치가 궁지에 몰렸을 때 마지못해 고르는 차선책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필자 김백진 변호사
- 브라운 로펌 대표변호사
- 화가, 소설가, 방산 전문가
- 고려대 법학 박사
- 전 고등군사법원 판사
- 전 국방부&육군본부 검찰단 검사
-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
- 전 방위사업청 송무담당
- 주요 저서 : 국유재산법, 방위사업관련 저서 및 논문 다수
- 업무 분야 : 일반 민-형사, 방위사업 및 군 관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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