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리더뉴스] 우리는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바꾸려면, 어느 나라를 벤치마킹해야 할 것인가? 남미 콜롬비아라고 한다면 어떤가? 비록 내전과 마약으로 점철된 나라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만할 '교훈적 메시지'가 적지 않다는 점을 현지 전문가 양삼일 이사장이 생생하게 전해준다. [편집자주]
콜롬비아 헌법이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적 메시지
- 카르텔이 바꾼 헌법, 헌법이 바꾼 나라-
1989년 8월의 일이다. 나는 보고타에서 세 시간쯤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시로 가까워질수록 차가 이상하게 막혔다. 사고인가 싶어 라디오를 켰다. 반복되는 속보, 긴박한 목소리. 대선 후보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이 유세 중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멈춰 있었고, 우리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 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많은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나라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갈란은 마약 카르텔과 정치권의 유착을 끊겠다고 개혁을 외쳤던 사람이었다. 그가 쓰러지자, 비로소 콜롬비아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 나라는 다시 바로 설 수 있는가.
그 답은 2년 뒤에 나왔다. 1991년 헌법이다.
무너진 나라가 택한 길
1980년대 콜롬비아는 국가라기보다 전쟁터에 가까웠다. 마약 카르텔은 도시를 장악했고, 경찰을 매수했으며, 판사와 기자를 거리에서 죽였다. 게릴라 조직은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법은 존재했지만 작동하지 않았고, 대통령은 있었지만 통치하지 못했다.
이 위기의 핵심은 단순한 치안 붕괴가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었다. 전통 양당의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은 스스로를 견제하고 정화하지 못하는 구조. 마약 자본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국가적 비상 사태에서 콜롬비아 사람들은 더 강한 지도자를 요구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권력 자체를 다시 설계하자고 요구했다.
1990년,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일곱 번째 투표용지(Séptima Papeleta)' 운동이 시작되었다. 기존 투표지에 더해 비공식 종이 한 장을 넣어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자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인정된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 파장은 컸다. 사람들은 강한 권력이 아니라, 통제되는 권력을 원했다.
1991년 헌법은 그 요구의 결과다. 이 헌법은 선언한다. 우리는 유럽의 후예도 가톨릭의 나라도 아니다. 어떤 정치, 종교, 문화 권력도 다시는 독점되지 않도록 하라.
사법권력도 나눠야 한다
한국의 사법부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 구조다. 법 해석의 최종 권위와 사법행정이 한 축에 모여 있다.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권한도 집중되어 있다.
콜롬비아는 다른 길을 택했다. 사법 권력을 하나로 모으지 않고, 네 개의 축으로 나누었다.
헌법재판소(Corte Constitucional)는 모든 법률과 국가 권력이 헌법에 맞는지 판단하는 기관이다. 대통령의 행정명령도 예외가 아니다.
대법원(Corte Suprema de Justicia)은 형사·민사·노동 사건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최고 법원이다.
행정최고법원(Consejo de Estado)은 시민과 국가기관 사이의 행정 분쟁을 해결하는 행정 분야 최고 법원이다. 하급 법원 판사들이 유사한 사건을 처리할 때 따라야 할 판례 기준도 제시한다.
사법행정위원회(Consejo Superior de la Judicatura)는 판사의 인사와 징계,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독립 기관이다. 재판 권한과 인사 권한을 같은 손에 두지 않기 위한 장치다.
이 네 기관은 위계로 묶여 있지 않다.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지배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견제한다.
그러다 보니 충돌도 생긴다. 콜롬비아에서는 이를 '초케 데 트레네스(Choque de Trenes)', 열차 충돌이라고 부른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을 헌법재판소가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뒤집으려 할 때 두 기관이 팽팽하게 맞서는 식이다. 혼란처럼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느 기관도 절대 권력을 가질 수 없다는 증거다. 폭주하는 열차를 막는 건 다른 열차뿐이다.
한국에서는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장 직속으로 운영된다. 인사와 행정 권한이 한 축에 모여 있다. 이것을 안정으로 볼 것인지, 위험으로 볼 것인지는 관점의 문제다. 콜롬비아는 그것을 위험으로 보았다.
시민이 법원 문을 두드리는 방법
콜롬비아에서 시민이 법원에 접근하는 방식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명확히 나뉜다.
민사, 가사, 노동 사건은 시민이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직접 소장을 낸다. 검찰은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판사와 당사자 사이의 문제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형사 사건이다. 형사 고소는 검찰청(Fiscalía)에 접수한다. 검찰이 수사해서 혐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면 법원에 기소장을 낸다. 재판을 여는 권한, 즉 기소권은 검찰이 갖고 있다. 이 점은 한국과 같다.
그러나 2017년부터 예외가 생겼다. 개인 기소인(Acusador Privado) 제도다. 명예훼손이나 단순 절도 같은 경미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검찰의 승인을 받아 직접 법정에서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다. 좁은 문이지만, 닫혀 있지 않다. 검찰 권력을 우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시민에게는 의미 있는 견제 수단이다.
한국에도 재정신청 제도가 있지만, 활용 범위가 좁고 절차가 까다롭다. 검찰을 우회하는 시민의 길은 여전히 좁다.
검찰 권력을 묶어두는 방법
한국에서 검찰은 오래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수사하고, 기소하고, 영장을 청구하는 권한이 한 손에 모여 있었다. 그 구조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먼지털이식 수사'다. 원래 사건과 무관한 혐의를 수사 도중 끄집어내 압박 수단으로 쓰는 방식이다. 수사와 기소가 한 사람 손에 있을 때 생기는 유혹이다.
콜롬비아도 검찰이 기소권을 갖는다. 그러나 그 권력을 묶어두는 장치가 다르다.
핵심은 보증 판사(Juez de Control de Garantías) 제도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인신구속, 압수수색 등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려면 반드시 이 판사의 실시간 심사를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판사가 서류를 보고 사후 승인을 하는 방식과 다르다. 콜롬비아의 보증 판사는 수사 단계부터 검찰 옆에 서서 절차를 감시한다. 검찰이 권한을 넘으려 하면, 그 자리에서 막는다.
현장 수사도 검찰이 단독으로 이끌지 않는다. 실제 수사는 검찰 산하 기술수사대(CTI)나 경찰 내 전문 수사 조직(Sijín)이 담당하고, 검찰은 법적 지휘를 맡는다. 검사가 수사관을 직접 거느리는 구조가 아니다. 이 분리가 한국식 별건 수사를 절차적으로 훨씬 어렵게 만든다.
검찰도 공직자다
콜롬비아에서 검사는 특수한 신분이 아니다. 일반 공직자와 같은 책임 구조 안에 있다.
재판의 독립은 존중받는다. 그러나 고의적인 직무 위반이나 부패는 형사 책임의 대상이 된다. 공직윤리감찰원(Procuraduría)은 검사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의 행정적 책임을 감시하고 직무 정지나 해임 같은 제재를 내릴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행위가 헌법에 어긋나는지 판단할 수 있다. 국가감사원은 검찰 예산 집행을 감시한다.
견제 축이 하나가 아니다. 재정, 징계, 형사, 헌법 심사가 각각 다른 기관에 분산되어 있다. 검찰이 어느 한 기관을 장악하더라도 나머지가 작동한다.
한국에서 검찰 개혁 논의가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권한이 집중된 구조에서는 그 권한을 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콜롬비아가 선택한 방향은 달랐다. 사람을 믿는 대신, 법적 제도로 묶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다른 선택
콜롬비아의 법적 체제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관 간 충돌이 실제로 벌어지고, 의사결정은 느리다. 제도가 복잡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위험을 더 크게 보았다. 권력의 독점이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정의는 늦지만, 발을 절면서도 결국 도착한다." 1991년 헌법은 이 믿음을 제도로 옮긴 결과였다. 빠른 처벌이 아니라 느린 통제,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촘촘한 견제를 택했다.
법 왜곡죄: 독립은 책임으로부터 자유가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른바 '법 왜곡죄' 입법이 추진되었다. 판사가 고의로 법을 왜곡해 판결했을 경우 형사 책임을 묻자는 취지다. 대법원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사법 독립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주장은 분명 타당하다. 사법권의 독립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기는 어렵다. 독립은 어디까지인가. 책임으로부터의 면제까지 포함하는가.
콜롬비아는 이 둘을 나누지 않았다. 재판의 독립은 존중하되, 고의적 직무 범죄는 형사 책임의 대상이 된다. 형사 기소는 국가검찰청(Fiscalía General de la Nación)이 담당하고, 징계는 별도의 기관이 맡는다. 독립과 책임을 함께 제도화한 구조다.
사법 독립은 성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역 없이 정의를 집행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 그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권력은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헌법은 권력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권력을 묶어두라고 말한다. 지도자의 선한 의지를 기대하라고 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로 견제하라고 말한다.
콜롬비아는 폭력과 부패, 암살의 시대를 지나면서 정점을 강화하는 대신 권력을 나누는 쪽을 택했다. 효율보다 견제를, 속도보다 통제를 선택했다. 권력이 스스로 멈출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한국의 사법 개혁 논의 역시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통일된 구조가 안정인지, 분산된 견제가 더 안전한지. 권위를 지킬 것인지, 시민의 권리를 더 앞에 둘 것인지.
콜롬비아가 마약 카르텔과 좌우 게릴라의 폭력, 정치권의 부패를 겪고도 국가로서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1991년 헌법이다. 이 헌법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소수자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화국의 출발선이 되었다. 그 출발은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는 구조에서 시작됐다.
권력을 나누는 일은 생존의 조건이자 제도를 정화하는 방법이었다.

필자 양삼일 이사장
남미 콜롬비아에서 40여년간 살면서 문화와 정치를 기록하고 있는 필자는 아시아이베로아메리카 문화재단 이사장과 보고타 세종학당장, 메데진 시립대 한국문화혁신센터 공동소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중남미 사회를 동시에 읽는 통찰력을 인정받아 콜롬비아 하원문화교류 공로상(2025),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유공자 감사장 등 많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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