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양삼일의 중남미 시선 4] 제국의 역사는 250년마다 지각변동한다.. 올해 미국은 건국 250주년...
역사는 250년마다 지각변동을 한다
- 250년의 리듬 앞에서 -
보고타에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슬며시 놀라곤 한다.
내가 딛고 서있는 이 땅이 한때 바다 밑이었다는 것. 해발 2,700미터인 이 고원이 지각판의 충돌로 어느날 갑자기(?)솟구쳐 올랐다는 것. 아, 수천만 년에 걸친 변화가 지금 내 발아래 굳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지각변동 못지 않게 놀라운 일들이 연일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올해 초 이웃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날라온 소식은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미국에 압송되었다는 뉴스였다.
두 달 후에는 더 큰 충격이 왔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전격적으로 공격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사망했고, 이란은 보복으로 이스라엘과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UAE 등 중동 전역의 미군 기지와 에너지 시설을 향해 미사일과 드론을 쏟아냈다. 세계 최대 LNG 시설이 있는 카타르의 라스라판이 공격을 받았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었다. 세계 경제의 동맥이 막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게 들렸다.
지각변동과 전쟁이라는 두 사건은 성격이 전혀 달랐지만, 내게는 같은 소리로 들렸다.
1945년 이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 주권 존중, 다자간 협의,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 그 틀이 소리를 내며 쩍쩍 금이 가는 소리...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멈췄다. 이것은 한 시대의 돌출 행동인가. 아니면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무엇인가?
그 질문을 붙들고 있다가 다시 꺼내 든 이름이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존 배것 글럽이었다.
나는 그것을 분석 도구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의 타이밍을 읽는 리듬 감지기로 쓴다.
역사학자 글럽은 세계사를 이끌었던 제국들의 수명을 연구했다.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오스만, 대영제국. 나라의 크기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수명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평균 250년, 대략 10세대였다.
그는 이 주기를 우연이 아니라, 문명이 스스로 힘을 소진해 가는 하나의 '리듬'으로 보았다.
흥미로운 건 쇠퇴가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제국은 처음엔 결핍과 거친 힘에서 출발한다. 정복하고, 무역을 하고, 점점 풍요를 쌓아간다. 그리고 그 풍요의 정점에서 엘리트들이 등장한다.
세련되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제도를 만들고, 논쟁을 즐기고, 규칙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글럽은 이 시기를 이렇게 불렀다. ‘용기 없는 영리함.’ 현장의 부족함은 보지 못한 채, 말과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다가 점점 멈춰버리는 시기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쇠퇴다. 익숙함이 변화를 막고, 내부 갈등은 점점 커진다.
2026년, 미국은 건국 250주년을 맞는다.
역사 속 제국들은 이 250년이라는 경계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로마는 왕정이 무너지고 굳어졌을 때, 왕만 바꾸지 않았다. 왕정 자체를 없애고, 공화정이라는 전혀 다른 체제를 만들었다. 그 변화가 로마를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끌어올렸다. 구조를 바꾼 덕분에 오래 살아남은 것이다.
조선은 달랐다. 건국 200년을 넘긴 임진왜란 전후, 변화의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실학이 싹을 틔우고 있었고, 오래된 체제에도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트들은 여전히 명분에 매달려 있었고, 변화는 부분적인 조치에 머물렀다. 대동법과 상평통보 같은 개혁은 있었지만, 구조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쇠퇴는 길게 이어졌고, 결국 식민지로 끝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시점을 조선이 로마처럼 구조를 바꿨어야 했던 결정적인 순간으로 보았다.
같은 임계점 앞에서, 어떤 문명은 스스로를 해체하고 다시 시작했다. 어떤 문명은 버티다가 무너졌다.
트럼프를 이 틀 안에 놓고 보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덕적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보면, 그는 250년이라는 임계점에서 미국이 스스로 변화를 불러내는 필연처럼 보인다. 지성기 엘리트의 카르텔, 복잡하게 얽힌 규범, 세련된 말로 포장된 정체. 그것이 제도를 서서히 숨 막히게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낡은 옷을 찢어야 했다. 그게 전쟁이었다.
이란 공격은 그 방식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다. 오만에서 핵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란 외무장관은 공격 이틀 전까지 “역사적 기회가 눈앞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고 군사 행동을 선택했다. 마두로 압송과 이란 공격, 두 사건 모두 지난 80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지던 질서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제국이 생존을 위해 다시 힘의 근원을 붙잡으려는 거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는 늘 이런 식으로 움직여왔다. 로마가 왕정을 없앴을 때도,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리듬은 반복된다.
보고타의 안데스가 지각판의 충돌로 만들어졌듯, 지금 중동의 불길과 국제 질서의 흔들림도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동일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공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진동이 멈추고 나서야 산맥의 모습이 드러나듯,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아직은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혼돈을 견디기보다, 하나의 리듬으로 읽으려 한다. 250년마다 찾아오는 이 임계점 앞에서, 문명을 살리는 힘이 세련된 제도나 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결핍을 견디는 힘, 낡은 것을 버리는 용기,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의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나는 이 거친 진동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관찰자로 서 있으려 한다.
여기 이곳 보고타의 2,700미터의 고원 위에서, 이 땅을 만든 충돌의 기억을 발밑에 두고...
필자 양삼일 이사장
남미 콜롬비아에서 40여년간 살면서 문화와 정치를 기록하고 있는 필자는 아시아이베로아메리카 문화재단 이사장과 보고타 세종학당장, 메데진 시립대 한국문화혁신센터 공동소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중남미 사회를 동시에 읽는 통찰력을 인정받아 콜롬비아 하원문화교류 공로상(2025),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유공자 감사장 등 많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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