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롬비아=양삼일] 남미 콜롬비아에서 40년간 살고 있는 양삼일 세종학당 이사장이 이번에는 현지 어린이의 도서전을 자연스럽게 왕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면서 우리 한국사회를 향해 묘한 메시지를 남겨준다. [편집자주]
계단을 내려온 왕
콜롬비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메데진에서 '특이한 아동도서전'이 열렸다.
이 도시 이름을 들으면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먼저 떠올린다. 마약과 폭력, 무너진 가정과 공동체. 그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위한 책이 열린다.
나는 그 장면이 늘 인상적이다. 상처 입은 도시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문학을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한국 작가 정진호가 초청되었다.

정진호는 건축을 공부했다. 그림책 작가가 되기 전에 건축학도였다.
그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는 아이의 방을 비교적 자유롭게 맡겨 두었다. 가구 배치는 아이의 몫이었다. 어느 날 그는 침대를 문 앞으로 옮겼다. 부모가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아이가 스스로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놀이처럼 시작된 그 작은 실험이 건축가를 꿈꾸게 했다.
대학에서도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졸업 논문 대신 그림책을 제출하려 했다. 건축학과에서 그림책을 논문으로 받아줄 교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꽤 긴 어려움 끝에 그의 시도를 이해해 준 교수를 만났다. 흥미로운 건, 졸업을 앞 둔 그는 이미 출판된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그림책을 펼치면 이야기보다 공간이 먼저 보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 건물 사이의 거리, 창문과 계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틈. 건축이 다루는 것은 결국 공간과 시간의 관계인데, 그 감각이 그림책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아이들은 그림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읽는다. 어른들은 그 사이에 놓인 질문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같은 책을 읽지만 서로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식탁 위의 책 한 권이 세대 사이의 대화를 연다.

그의 작품 중 한 편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다. 왕 이야기다.
왕은 높은 곳에 살고 있다. 신민들을 만나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려 한다. 그런데 왕이 있는 곳은 너무 높고, 내려오는 길은 너무 길다. 하루 종일 계단을 따라 내려왔지만, 민중을 만나는 시간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다.
권력과 삶 사이의 거리. 이해하려 애써도 그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전환은 여기서 시작된다. 왕은 자신의 망토를 계단 위에 깔고 미끄러지듯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더 빨리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옷은 찢어지고, 왕관도 깨진다. 권위의 표식들이 망가진 채로 그는 마침내 민중과 마주한다.
그 만남의 의미는 단순히 왕이 백성을 본다는 데 있지 않다. 왕권을 상징하던 것들이 사라진 순간, 그는 더 이상 높은 곳의 통치자가 아니다. 민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권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 기쁨, 고단함. 그리고 왕은 고민한다. 이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인가. 그가 내린 결론은 왕국을 놀이터로 바꾸는 것이었다.
어린이 그림책 속 장면이지만, 나는 이것을 동화로만 읽지 않는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노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숨 쉬고 웃을 수 있는 공간을 상징한다. 정치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통치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하는 데 있다. 왕이 튜니카를 깔고 계단을 미끄러지는 장면은 그것을 묻는 은유처럼 느껴진다. 권력은 종종 자신이 짜 놓은 각본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언제나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정진호는 대구 출신이다. 보수적인 도시로 알려진 곳. 그런데 그의 그림책은 매우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 준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이야기 속에 철학을 담아내는 힘. 나는 그것이 한국 그림책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이 스페인어로 더 많이 번역된다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새로운 독자를 만날 것이다.
이 지역도 가족의 해체와 세대 간 대화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림책 한 권이 아이와 부모를 같은 자리로 불러 모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상상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책, 기억과 경험을 꺼내게 하는 책.
한국의 한 작가가 그린 그림책이 메데진의 한 가정에서 펼쳐지고, 부모와 아이가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 작은 대화 속에서 문화는 국경을 넘어 이웃이 된다.
기억을 놓고 싶은 망각의 도시가 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계단을 내려온 왕 이야기가 놓였다. [콜롬비아=양삼일 세종학당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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