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배, 놀부가 기가 막혀
- 김한식 시인 -
정월 초하루 설날이 오면
햇살 따스한
흥부네 마루엔
수북수북 복돈이 쌓이고
세뱃돈 구르는 소리가
놀부 귀에 쏙쏙 들어가면
꾸르륵 꾸르륵
심술보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곰방대 툭툭 두드리며
덜컹덜컹
흥부 집 대문을 밀고 들어
어이쿠, 아우야
형이 세배하러 왔다
무릎을 쿵쿵, 이마를 탁탁
형님이 아우께 큰절을 올린다
짹짹거리는 참새가 손뼉을 치고
덩실덩실 까치도 춤을 추니
놀란 흥부는
아이구 형님, 이게 웬일이래요
허허허 웃음보가 터지자
장단이 덩덕궁 덩덕
덩덕궁 덩덕
막걸리 사발도 덩실덩실
놀고 있는
놀부의 이름은
따로 노는 사내란 뜻인가
생각 따로, 욕심 따로
따로따로 살아온 세월에
흥부 복이 열 자면
나는 스무 자에 서른 자요
얇은 입술 실날 웃음에
눈방울은 떼굴떼굴
손은 돈 자루를 더듬더듬
아우야, 세배는
두 번, 세 번, 열 번에
많이 할수록
돈다발이 굴러온다지
쿵덕쿵 쿵쿵, 다시 엎드려
머리 박고 또 쳐 박고
쨍그렁, 쨍그렁
세뱃돈 굴러오는 소리 들린다
흥부는 박장대소하며
형님, 돈보다 웃음이 좋지요
웃음이 돈보다 좋다고
놀부가 기가 막혀
돈 자루 속에 얼굴을 파묻고
코끝이 찡긋
눈꼬리가 힐끔 힐끔
욕심은 뻥튀기가 되고
그래도 설날
한 차례 절을 하다 보니
심술보도 잠시 접히고
그러나
사람 냄새보다
돈 냄새가 먼저 코끝에 맴돌더라
ㅡ 전통 윤리가 자본의 논리로 전환되는 현실 -
이 시는 고전 설화 속 놀부를 현재로 호출하여, 전통적 의례가 자본의 논리로 전환된 현대 문명의 풍경을 해학적으로 비추는 시적 풍자입니다. 세배라는 행위는 본래 공동체의 연대와 축복의 교환을 상징하지만, 여기서 놀부에게 세배는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투자와 수익을 계산하는 경제적 제스처로 전락합니다. 그는 절을 반복할수록 돈이 굴러온다는 믿음 속에서, 몸을 낮추는 행위를 영혼의 겸손이 아니라 이익을 증식시키는 기술로 전유합니다.
놀부의 “생각 따로, 욕심 따로”는 현대인의 분열된 주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는 공동체의 축제 속에 있으나 공동체적 감각을 공유하지 못하고, 타자의 웃음 속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못하는 분리된 개인입니다. 흥부의 웃음과 놀이, 까치와 참새의 춤은 공동체적 기쁨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상징하지만, 놀부의 감각 세계에서는 그것마저 돈의 소리와 교환가치의 리듬으로 환원됩니다. 이 장면은 축제와 놀이마저 상품화되는 현대 문화의 구조를 우화적으로 반영합니다.
특히 반복되는 세뱃돈 소리의 의성어는 자본의 청각적 질서를 형상화합니다. 놀부의 귀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화폐의 울림에 먼저 반응합니다. 이는 현대 문명이 인간의 감각 체계를 재구성하는 방식, 곧 감각의 자본화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타자의 얼굴보다 숫자와 소리에 먼저 감응하도록 길들여진 존재가 됩니다.
마지막 구절 “사람 냄새보다 돈 냄새가 먼저 코끝에 맴돌더라”는 이 시의 문명 비판적 핵심 문장입니다. 후각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마저 자본의 기호에 의해 점유되는 순간, 인간적 친밀성은 시장의 논리에 종속됩니다. 여기서 놀부는 더 이상 개인적 악인의 캐릭터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감각 구조를 내면화한 문명적 인간형입니다.
이 시는 결국 설날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통해 묻습니다. 전통은 여전히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는가, 아니면 자본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장식물로 남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놀부를 비웃으면서도, 그의 코끝에 맴도는 돈 냄새를 함께 맡고 있지 않은가. 해학은 웃음을 낳지만, 이 웃음은 문명 비판의 미묘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놀부의 심술보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 시대 욕망 구조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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