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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서귀포의 바다...인간의 생을 훈육하고 감내하게 하는 거대한 스승이자 동반자...

  • 김한식 시인 기자
  • 입력 2026.01.23 11:50
  • 글자크기설정

버커리의 바다 2.jpg

 

서귀포, 바다가 숨을 고를때

 

              - 김한식 시인 -

 

  한라산 자락 남쪽 끝에서 바다는

  먼저 몸을 숙입니다

  철썩, 철썩

  검푸른 물결이

  현무암 가슴을 두드리면

  새벽은 뚝, 뚝

  밤의 그림자를 떨굽니다

  어부의 손은

  거칠게 엮인 그물 위에서

  슥슥, 탁탁

  파도의 결을 만져봅니다

  바다는 늘 계산보다

  먼저, 몸으로 배웁니다

  호이— 호이—

  해녀의 숨비소리

  물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으면

  잠잠하던 바다는

  꿀렁, 꿀렁

  가슴을 깊이 열어 줍니다

  물질 끝에 올라오는 숨

  푸하— 푸하ㅡ

  숨 쉬는 소리마다 하루가

  하나씩 건져집니다

  파도는 그렇게

  사정없이 밀려오고

  사박사박 현무암 위를 지나

  살점 같은 시간을 깎아냅니다

  비린내 섞인 바람이

  후욱—

  분홍빛 뺨을 스쳐가면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정쩡한 표정에

  갈색의 주름이 그어집니다

  해는 매일처럼

  툭— 바다 위에 던져지고

  사람들은 또 다시

  조용히 배를 밀어 냅니다

  서귀포 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철썩이는 파도와

  푸하— 내쉬는 날숨으로

  사랑의 속삭임을 기억합니다

  이곳에서 삶은

  소리 없이 몸에 새겨지며

  하루씩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버커리의 바다 1-1.jpeg

 

 

- 시 해설 : 몸으로 이어지는 삶의 문법 -

 

김한식 시인의 「서귀포, 바다가 숨을 고를 때」는 풍경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삶이 어떻게 몸에 새겨지는가를 증언하는 시입니다. 이 작품에서 서귀포의 바다는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생을 훈육하고 감내하게 하는 거대한 스승이자 동반자로 등장합니다.

 

시의 첫 행에서 “바다는 먼저 몸을 숙입니다”라는 구절은 자연의 겸허함을 말하는 동시에,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의 자세를 암시합니다. 한라산 자락 남단이라는 지리적 끝자락은 곧 삶의 조건이 가장 먼저 시험받는 자리이며, 바다가 몸을 숙인다는 표현은 자연조차 이곳의 삶 앞에서는 낮아진다는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밀도입니다. ‘철썩’, ‘뚝’, ‘슥슥’, ‘탁탁’, ‘꿀렁’, ‘푸하’와 같은 소리들은 단순한 청각적 장치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세계를 불러옵니다. 이는 말보다 앞선 노동의 리듬이며, 설명보다 먼저 작동하는 몸의 기억입니다. 어부의 손과 해녀의 숨은 언어가 되기 전부터 이미 삶을 배워온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시는 “바다는 늘 계산보다 먼저, 몸으로 배웁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자연에 대한 진술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생존 철학을 요약한 핵심 문장입니다.

 

해녀의 숨비소리 ‘호이—’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건너오는 짧은 기도처럼 들립니다. 물질 끝에 올라오는 ‘푸하—’의 숨은 하루를 건져 올린 증거이며, 그 숨 하나하나가 곧 시간의 단위가 됩니다. 이 시에서 하루는 시계로 흘러가지 않고, 숨으로 건져 올려집니다. 이는 노동이 곧 시간이고, 생존이 곧 연대임을 보여줍니다.

 

중반부에서 파도는 “살점 같은 시간을 깎아내”며, 현무암 위를 ‘사박사박’ 지나갑니다. 이 장면은 자연의 반복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마모되고 형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람에 스친 분홍빛 뺨과 갈색의 주름은, 젊음과 노년이 동시에 한 얼굴에 공존하는 이곳 삶의 초상을 담아냅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은, 이 시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비극의 호소도, 낭만의 미화도 없습니다. 다만 버텨온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서귀포 바다는 말이 없습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파도 소리와 날숨으로 사랑의 속삭임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언어를 초과한 소통의 방식입니다. 이곳의 사랑은 선언되지 않고, 숨과 몸짓으로 전해집니다.

 

결국 이 시가 도달하는 지점은 마지막 행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삶은 / 소리 없이 몸에 새겨지며 / 하루씩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삶은 성취가 아니라 통과이며, 말이 아니라 흔적입니다. 김한식 시인은 서귀포를 통해,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원초적 문법—몸으로 살아내는 방식을 조용히 되돌려 줍니다. 이 시는 읽히기보다 오래 남아, 독자의 호흡 속에서 천천히 다시 숨을 고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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