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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식의 시] 혀끝에 남은 엿가락.. 한국적이면서 보편적인 존재론적 시..우리 삶도 엿처럼 단맛에서 쓴맛을 거쳐 깊은 맛으로...

  • 김한식 시인 기자
  • 입력 2026.01.11 18:57
  • 글자크기설정

동네엿장수.jpg

  

   혀끝에 남은 엿가락

 

            - 김한식 -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짤깍 짤깍

   동구 밖 공기를 자를 때

   조무래기들은

   우르르, 우당탕 탕

   먼지를 몰고

   골목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엿판 위에서 호박엿과 쌀엿이

   쭈욱 쭉 늘어지는 순간

   혀는 먼저 웃음을 자아내고

   이빨은 쩍, 하고

   엿판에 들러붙습니다

   토막 난 엿가락에

   해는 늘 머리 위에 있었고

   달달한 맛보기 엿은

   내 인생의 맛보기였습니다

   시간이 풀잎처럼 자라나

   책가방이 무거워질 때

   삶은 쓴 맛을 풀어 놓았습니다

   씁쓸하고 떨떠름한 좌절은

   땡감처럼 목에 걸려

   덜 익은 시간으로 남아

   할퀸 가슴을 텅 비게 했습니다

   가장이 된 장년의 밥상에서

   삶은 비로소 제 얼굴을 내보이고

   쓰고 짜고 알큰하게 매운 맛은

   훌쩍이는 눈물 콧물이 되어

   밥그릇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삶이란 단맛이 아닌

   짤깍 하고 잘린 엿가락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을,

   노을 진 햇살에

   딸각거리는 숟가락을 잡은

   저녁에

   풋고추 송송 썰어 넣고

   파 마늘에 고춧가루 양념 가득한

   뚝배기의 뜨거운 된장국을

   후우하고 불어 마시면

   그제서야 삶의 맛이 생겨납니다

 

- 시 해설 -

김한식의 「혀끝에 남은 엿가락」은 한 개인의 생애를 ‘맛’이라는 감각의 연대기로 풀어낸, 매우 한국적이면서 보편적인 존재론적 시입니다. 이 시는 추억을 회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삶이 어떻게 단맛에서 현실의 쓴맛으로, 다시 깊은 맛으로 변해 가는가를 차분하면서 묵직하게 증언합니다.

 

시의 첫 장면은 청각으로 시작됩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 짤깍 짤깍”은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시간을 가르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유년의 세계를 여는 신호이자, 훗날 삶을 잘라내고 나누는 운명의 예고처럼 울립니다. 아이들이 먼지를 몰고 골목으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욕망이 아직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 삶이 전부 달콤하게 느껴지던 시기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냅니다.

 

엿이 “쭈욱 쭉 늘어지는 순간” 혀가 먼저 웃고 이빨이 엿판에 들러붙는 대목은 욕망의 즉각성과 순진함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혀와 이빨은 판단 이전의 몸, 생각보다 앞서는 감각입니다. “맛보기 엿은 내 인생의 맛보기”였다는 고백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은유입니다. 삶은 처음부터 본맛을 허락하지 않고, 언제나 맛보기로 우리를 유혹한다는 사실을 유년의 경험 속에서 이미 알아차립니다.

 

중반부에 이르러 시간은 “풀잎처럼 자라나” 책가방은 무거워집니다. 이 장면은 성장의 은유이지만, 동시에 책임과 좌절이 축적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삶이 풀어 놓는 쓴맛은 땡감처럼 목에 걸려 쉽게 삼켜지지 않습니다. 덜 익은 시간, 즉 준비되지 않은 채 맞닥뜨린 현실은 가슴을 할퀴고 한동안 사람을 비워 둡니다. 이 비어 있음은 상실이자 성숙의 시작입니다.

 

가장이 된 이후의 밥상은 이 시의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절절한 장면입니다. 삶은 이때 “비로소 제 얼굴을 내보이고” 맛은 더 이상 감미가 아니라 쓰고, 짜고, 알큰하게 매운 복합적인 층위를 띱니다 눈물과 콧물이 밥그릇에 떨어지는 장면은 삶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가족과 책임의 몫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음식은 생존이며, 밥상은 삶의 전선입니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삶은 단맛이 아니라 “짤깍 하고 잘린 엿가락처럼 /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엿은 늘어날 때보다 잘릴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나듯, 삶 또한 상실과 단절 속에서 비로소 자기의 온도를 드러냅니다. 이 깨달음은 어떤 교훈으로 선언되지 않고, 저녁 풍경 속에서 조용히 스며듭니다.

 

마지막 된장국 장면은 이 시의 정점입니다. 풋고추, 파, 마늘, 고춧가루가 어우러진 뜨겁고 투박한 국물은 유년의 엿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달콤하지 않지만 깊고, 화려하지 않지만 속을 데워 주는 맛. "후후 하고 불어 마시며” 비로소 삶의 맛이 생긴다는 결말은 삶이란 천천히 식히고 조심스레 삼키며 견디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 시는 추억의 시가 아니라 성숙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 혀끝에 남아 있는 것은 단맛의 잔향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해 온 삶의 온기입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삶은 달콤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녹아내릴 만큼 오래 입안에 머물렀기에 비로소 ‘맛’이 된다는 사실을 조용하고 단단한 언어로 증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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