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 년 세월을 보낸 은행나무를 보며 자신의 내면과 이어지는 신비로운 평화를 느껴...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
- 김한식 -
티 없이 맑은 가을 하늘가에
천 년의 세월이
한 줄기 뿌리에서
고요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 오래된 숨결을 따라
황금빛 잎사귀가 날아갑니다
청명한 하늘은 눈부시고
시냇물은 맑은 노래로
쉼 없이 바위를 씻어 냅니다
기암괴석의 산세는 고요히
절을 올리듯
묵언으로 세월을 지킵니다
종소리가 바람을 따라
영원의 골짜기로 흘러들어갈 때,
나무는 천 년의 고해를 품고
말없이 서 있습니다
해 그림자 길게 늘어서면
은행 나무의 뿌리와 내 숨결이
가을빛으로 곱게 물들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녘 하늘 끝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영원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 시 해설 -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는 단순히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시간과 생명, 그리고 존재의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용문사에 서 있는 천 년 된 은행나무를 통해,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한 삶을 대조하면서 그 둘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천 년의 세월이 /한 줄기 뿌리에서 /고요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숨을 쉰다’는 표현은 나무가 단순히 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나무는 천 년 동안 시대의 변화를 모두 지켜보며,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와 기도를 품어왔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청명한 하늘, 맑은 시냇물, 절을 올리듯 고요한 산세”가 등장합니다. 이 부분은 자연의 고요한 장엄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묵언(默言)이라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말없이 세월을 지키는 산과 나무, 그 침묵 속에는 오히려 말보다 깊은 깨달음과 위안이 스며 있습니다.
“종소리가 바람을 따라 /영원의 골짜기로 흘러들어갈 때”라는 대목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표현합니다. 사찰의 종소리는 인간의 소망과 회한, 그리고 세월의 고해를 실어 멀리 흘러갑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영원의 숨결을 느끼십니다.
마지막 부분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영원을 향해 날아오릅니다”는 매우 상징적인 결말입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고, 부엉이는 늦게 오는 지혜의 상징입니다. 철학자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고 했습니다. 즉, 하루가 저물 때 비로소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 이미지를 통해, 삶의 깊은 이해는 오랜 세월을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지혜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이 시는 ‘자연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시간을 성찰하는 노래’입니다. 은행나무의 천 년 세월과 인간의 짧은 생애는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이지만, 시인은 그 경계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시인의 숨결이 가을빛으로 물드는 순간, 영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는 단순한 자연시를 넘어, 인간의 영혼이 시간과 자연 속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묻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다 읽고 나면, 독자는 어느새 그 나무 아래 서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호흡 속에서, 천 년의 세월이 자신의 내면과 이어지는 신비로운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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