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한계와 욕망, 그리고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시적으로 재해석한 작품
바람이 시간을 스쳐간다
- 김한식의 시 -
성전 마당에 먼지가 자욱하다
소 울음에 양이 울고
은전 쏟아지는 소리에
제사장들의 입은
크게 벌어진다
바람을 품은 눈빛에
침묵을 두른 발걸음으로
돌 계단을 오르는
낯선 사나이
어찌,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의 숨결은 돌덩이로
굳어지고
성전의 돌기둥마저 흔들린다
노끈으로 채찍을 엮어
광야의 바람처럼
휘휙거리며 성전을 휘젓는다
소 떼가 달아나고
양 떼가 서로 부딪치며 튀쳐나간다
땡그렁, 땡그렁 땡그르르
은전 굴러가는 소리 요란하고
이미, 상인이 된 제사장들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뒤엎어진 상 위에
부서진 욕망의 파편들,
바람이 시간을 스쳐가고
타버린 신앙의 재가 흩날린다
이 성전을 헐어라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바람만 골목을 스쳐간다
무너진 것은
제사장들의 울타리였고
세워진 것은
보이지 않는 그의 성전이었다
김한식의 시 '사람이 시간을 스쳐간다'는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인간의 신앙과 욕망, 그리고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시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성경 장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과 인간 실존을 겹쳐 읽게 만드는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장면의 구조 ― 드라마틱한 3막 구성
시 전체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부패한 성전의 현실
“성전 마당에 먼지가 자욱하다 /소 울음에 양이 울고 /은전 쏟아지는 소리에 /제사장들의 입은 크게 벌어진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공간이어야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먼지, 짐승의 울음, 돈의 소리로 가득한 장터로 그립니다. 특히 “제사장들의 입은 크게 벌어진다”는 구절은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종교 권력의 탐욕을 드러냅니다. 성전의 부패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욕망 구조를 비추는 거울로 읽을 수 있습니다.
② 예수의 분노와 충돌
“바람을 품은 눈빛에 /침묵을 두른 발걸음으로 /돌 계단을 오르는 낯선 사나이” 예수는 바람을 품은 눈빛과 침묵을 두른 발걸음으로 성전에 들어섭니다. 바람은 성령과 진리, 자유를 상징하고, 침묵은 신적 권위와 내적 결기를 드러냅니다. 예수의 한 마디 ― “어찌,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이 절규는 청천벽력처럼 터지며, 사람들의 숨결은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성전의 돌기둥조차 흔들립니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예수의 행위를 단순한 분노로 그리지 않습니다. 예수는 노끈으로 채찍을 엮어 상을 뒤엎고, 동물을 풀어놓고, 돈을 쏟아내지만, 그 분노의 본질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세우기 위해서 일어난 분노라는 점에서, 시 전체의 긴장감은 더욱 깊어집니다.
③ 시간과 영원의 교차
“바람이 시간을 스쳐가고 /타버린 신앙의 재가 흩날린다” 여기서 시는 단순한 사건을 넘어 시간과 영원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이 구절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몸, 그리고 이후 세워질 보이지 않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시간 속의 인간은 눈앞의 현상만 보며, 영원의 실체는 보지 못합니다. 바람이 골목을 스쳐가는 장면은, 신비의 진리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붙잡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은유합니다.
2. 핵심 상징 분석
성전 → 신앙의 중심이자 인간 내면의 공간
은전 → 물질적 욕망, 신앙의 부패
채찍 → 심판과 동시에 회복의 도구
바람 → 성령, 진리, 시간의 흐름을 아우르는 다층적 상징
무너진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 물질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의 전환
3. 제목 해석
제목은 시 전체의 신학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역사 속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그 의미는 시간에 갇히지 않고 영원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동시에, 인간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진리를 붙잡지 못한 채, 욕망의 무게 속에 머뭅니다. 이 제목은 시간성과 영원성의 긴장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시적 장치입니다.
4. 주제 의식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단순히 과거의 성전 사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성전은 과연 거룩한가? 우리의 신앙은 상업으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시의 핵심은 욕망의 무너짐을 통한 영적 갱신이며, 바람이 시간을 스쳐간다는 말은, 역사의 한순간을 넘어선 영원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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