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팔트시대에 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따듯한 위로와 격려
- 신학과 철학, 인문학을 두루 섭렵한 김한식 시인의 시와 글
[굿리더뉴스=최진 기자] 요즘 시대에 '스승'이나 '선비'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행운이다. 여기 인문학과 신학, 역사, 철학 등을 두루 통달했다고 할만한 노학자가 있다. 그는 또 시인이기도 하다.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탐구활동을 하고 있다. 차분하면서도 심오하고 격조 높은 그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김한식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에게 '오늘날 현대인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ㅡ 도마치고개와 버들치고개의 진실을 찾아 ㅡ
복사꽃 그늘에 서면
내 귀는
새보얀 등불을 켠다.
풀밭에
배암이 눈뜨는 소리
논두렁에
민들레가 숨 쉬는 소리
복사꽃 그늘에 서면
내 귀는 새보얀 등불을 켠다
언제 들어도 포근함을 느끼는 김춘수의 봄이다. 좋은 시는 독자들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고 마음을 정화시키며 삶의 위안을 준다. 그래서 중원의 늙은이는 제자들에게 시를 배우라고 다그쳤던 것일까? 시인에게 있어 고향은 영원한 추억이요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이며 삶의 터전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결코, 원만하고 평탄한 길이 아니다. 때로는 가파른 고갯길이 있고, 험한 숲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고단한 삶으로 타향살이에서 실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도 있다. 또 어떤이는 성공한 삶이라 생각하고 자아황홀경에 빠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도 배암이 눈뜨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민들레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어찌 고향이라 말할 수 있으며, 진실로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장은 때로는 우리의 인격성을 훼손한다. 삶이 짐이 되는가 하면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를 삭막한 인간으로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시인들의 노랫말은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요,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낭만이 가득한 자연의 품이다. 그러기에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그러한 고향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인생이라는 삶의 짐을 내려놓고 용인 성복동에 거주한지도 어언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매일처럼 오르는 오솔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산의 이름을 물어본다. 봉우리의 이름을 묻는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어린 시절에 내가 살던 고향은 재주넘기하기에 좋은 동산이었지만 이름이 있었다. 큰잔둥, 소산봉, 연대봉, 달뜸바오와 같은 정겨운 이름들이다.
왜 사람들은 산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꽃으로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은 일컬음이요 존재와 진실을 이어준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한 분에게서 ‘바지산’이라는 말을 듣는다. 바지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바지와 같은 모양 때문인가? 아니면 바지저고리와 같이 흔하다는 뜻인가? 그러던 어느날 산길에서 표석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기에는 '바'자는 지워지고 '지산'이라는 글자만 남았다. 뒷면에는 '기준점'이라는 또렷한 글씨가 보인다. 언제, 누가 기록해 두었을까? 바지산 표석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기쁨과 견주어보았다. 그렇다면 도마치고개나 버들치고개는 또 무슨 뜻인가?
광교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성복천의 느티나무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육백 살을 넘긴 나이에도 청청함을 잃지 않은 늙은이다. 느티나무의 대답은 ‘고전에서 찾아 보거라’는 한마디였다.「능엄경언해」와「석보상절」 그리고 「노걸대언해」와 「논어언해」를 읽으라는 대답이다. 그렇다. 우리 고전에는 그 때의 이름들이 분명하게 적혀 있을 것이다. 바지, 도마치, 버들치는 과연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우리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삶의 진실을 고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3:88)에는 '성냥바지'와 '흥정바지’라는 말이 보인다. 바지는 바치라(匠人 匠色) 우리 선인들은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를 장인이나 장색으로 불렀다. 갖바치 쇠바치가 모두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 바지산 자락에는 양쪽으로 성복천과 신봉천이 쉼없이 흐르고 있다. 바지산 자락에 살던 선인들이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었다는 말이다. 삼성과 SK의 반도체클러스터가 용인에 들어오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용인사람들의 DNA엔 선천적으로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단 말인가? 바지산자락을 끼고 양쪽으로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장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소중한 자원이다. 현재 용인에 들어서는 반도체클러스터도 대량의 물과 전기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훈몽자회(訓蒙字會 中卷10)에는 '도마는 좌판(坐板 座板)이라' 기록한다. 좌판은 물건을 팔기 위해 늘어놓은 널조각이 아니던가?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上18)에도 ‘이 바람 사잇집 도마엣 저육(猪肉 제육)을 사러가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바지산에서 장인들이 만든 팔찌 반지 귀걸이 단추 머리핀 비녀 같은 각종 장신구를 팔던 자리가 바로 도마치고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버들치고개는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버들치고개란 버드나무가 많은 고개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버들치고개에는 버드나무가 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버드나무는 시냇물이 흐르거나 호숫가의 습지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산 고개나 언덕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 성복천이 흐르는 시냇가엔 예나 지금이나 실버들이 자생한다. 성복천에는 오백년 전에도 버드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 버들뿐이겠는가? 냇버들, 부들, 갈대, 골풀, 싸리나무, 회양목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성복천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세간살이에 필요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이 우연이겠는가?
왕골이나 골풀로 돗자리를 만들고, 싸릿대가지로 바구니 소쿠리 동구리 채반 광주리를 만들었고, 버드나무를 태워 그림먹을 만들고, 버들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뿐이겠는가? 회양목으로는 인장을 만들어 거래가 활발해진 한성의 부호들에게 고가로 팔았을 것이다. 이렇게 돗자리를 만들고 세간살이에 쓸 가재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을 하대한 것이 한성 사람들이다. 그래서 버들치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갓바치, 성냥바치, 흥정바치는 한성양반들이 용인사람들을 하대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자기 이익만을 따지는 관리들을 비판적으로 부르던 말이 벼슬아치가 아니던가? 벼슬아치, 양아치, 동냥아치, 고쟁이의 방언에 핫바지가 있고 딸린 종들을 앗보치라 부르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여 도성을 한성으로 옮기자 개성을 비롯한 조선 팔도에 사는 권력층, 부유층이 한성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한성의 부유층들은 금은보석과 각종 노리개만이 아니라 칼, 도마, 바가지, 바구니, 소쿠리, 멍석, 돗자리, 문고리, 자물쇠와 같은 각종 세간살이도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흥정바치로 이름을 날린 개성상인들이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부유층이 쓸 가재도구, 장신구, 세간살이, 주방도구를 공급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것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통하는 삼남의 관문인 말죽거리(양재역)는 옛날에도 중요한 간이역이었다.
도마치고개에서 양재역인 말죽거리까지는 20km가 채 못 되는 가까운 거리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로 달려도 두세 시간이면 넉넉하다. 도마치고개에는 언제나 한성 사람들이 쓸 각종 세간살이와 장신구, 농기구가 넘치도록 쌓여 있었을 것이다. 도마치고개에서 짐을 가득 실은 한성 상인들의 우마차가 소말구리고개를 넘어 말구리고개를 거쳐 말죽거리(양재역)로 들어갔을 것이다. 말구리고개는 말 구유가 있는 고개라는 뜻일 것이다.
말구리고개 가까운 곳에 고기리라는 마을이 있다. 고기리가 고고리( 訓蒙字會, 瓜帶:참외꼭지)에서 나온 말이라면 거기에는 분명 꼭지가 있었을 것이다. 왈패꼭지였을까? 아니면 동냥아치나 땅꾼의 꼭지였을까? 그리고 손골( 訓蒙字會, 賓,客)이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마을이었다면 거기에는 연회를 베푸는 연회장도 있었을 것이다.
한성으로 가는 길목에 많은 상품이 있고 큰 거래로 흥정바치가 있는 곳에 왈패꼭지도 숙박마을도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하여 바지산, 도마치고개, 버들치고개, 소말구리고개, 고기리, 손골의 진실이 조금은 드러난 셈이다. 예술이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 고장 용인의 고단한 여로에서 눈물과 한숨, 그리고 슬픔과 괴로움, 때로는 맑은 미소와 밝은 얼굴로 살았을 선인들의 삶의 진실이 조금은 드러난 셈이다.
먼 훗날에 태양보다 일조 배나 밝은 케이사라는 별을 여행할 때,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내 고향은 진달래 피고 남실바람 살랑거리는 꽃그늘이라고 말하련다. 용인 바지산에는 그 때에도 바람이 살랑거리는 꽃그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처럼 오르는 바지산정상에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달래봉’이라는 이름이다. 왜, ‘달래봉’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우리의 삶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읊었던 고려가요 동동(動動) 삼월령에는 ‘삼월 지나며 피어난 아아, 늦봄의 달래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나셨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 때의 선인들은 진달래를 ‘달래’라 불렀다. 왜 달래라고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겨울은 춥고 배고픈 계절이다. 흉년으로 겨울이 되면 혹한의 추위에 굶어죽고,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면, 가난한 서민들에게 봄은 소생의 계절이요, 희망의 계절이었을 것이다. 봄이 되어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어나면 ‘아, 이제 살았구나’하고 찬탄했을 것이다. 풋나물이라도 뜯어먹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이라도 부쳐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달래꽃’은 그 자체가 삶을 달래주는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래’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문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참진자를 붙여 진달래라 불렀을 것이다. 하여 바지산정상의 이름을 ‘달래봉’이라 부른다. 산을 오르는 사람마다 심신의 위로를 받고, 삶의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이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살았을 바치들, 갓바치, 버들치, 도마치, 흥정아치, 동냥아치, 성냥아치만이 아니라 한양성의 벼슬아치도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산이라면 달래봉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겠는가? 하여 ‘달래봉’이라는 시를 읊어본다. 연분홍 진달래가 환하게 웃는다.

- 달래봉에서 -
살랑살랑 바람 따라 오르는
바지산 오솔길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본다
가다 쉬다 머뭇거리며
삶의 무게와
세월의 아픔을 보듬고
행로에 지친 나를 달래려
뒤따라오는 달래꽃,
꼬불꼬불
오르막에 걸터앉은
새소리
바람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밤하늘의 별들도 쉬어가는
달래봉에
남실남실 햇살 가득 쥐고서
가지가지마다 나눠주며
달려오는 실바람,
남실바람
쉬어가는 자리마다
피어나는 연분홍 진달래꽃
[출처] 현대인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 작성자 가을 나그네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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