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으로 가는 길
- 김한식 시인 -
살아온 길이 보일락말락
한 줄 실오라기 같은
외길이었습니다
시에서 철학을 건너고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가며
호모 켑티부스,
사로잡힌 인간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제는 말을
더 보태지 않으려고
깊은 숲으로 들어갑니다
젊음도 명예도
깨알같은 글씨도
끝내, 풀지 못한 물음까지도
하나 하나 내려놓습니다
그것은 삶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한 생을 살아낸 사람이
더 깊은 곳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숲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늙음을 슬퍼하지 않고
시들어 마른 풀잎은
계절이 오면 빛을 내려놓아
바람 불면 몸을 맡깁니다
소슬바람 나부끼는
청명한 가을날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 듯
그렇게
세상을 내려놓으며
죽음 너머의
긴 침묵으로 들어가렵니다
삶이 지나간 자리에
빛은 그림자를 남기고
한 줄의 바람이기를 바랍니다
- <해설> 숲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 길 -
김한식 시인의 「숲으로 가는 길」은 한 사람이 살아온 길의 끝에서 비로소 자신이 걸어온 길의 의미를 바라보는 시입니다. 처음부터 길은 선명하지 않습니다. “살아온 길이 보일락말락 / 한 줄 실오라기 같은 / 외길이었습니다.” 길은 거대한 도로나 뚜렷한 이정표가 아닙니다. 지나고 나서야 겨우 보이는 한 줄의 흔적입니다. 실오라기처럼 가늘고 희미하지만, 그 길은 분명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문화의 뿌리로, 다시 인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철학을 건너면서 인간의 존재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가며 한 민족과 한 인간이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는지를 살폈습니다. 그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호모 켑티부스”, 사로잡힌 인간입니다.
여기서 호모 켑티부스는 단순히 현대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 신화와 욕망, 권력과 국가, 이념과 자본, 경쟁과 소비, 타인의 시선과 자신이 만든 문명에까지 붙들려 왔습니다. 인간을 해방시키리라 믿었던 이성과 과학과 기술마저 어느 순간 인간을 다시 붙잡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평생 물었던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 질문은 지식으로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철학이 수천 년 동안 붙들어 왔지만 끝내 완전히 풀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말을 더 보태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시의 방향이 크게 바뀝니다.
평생 말해 온 사람이 이제 침묵을 선택합니다. 평생 질문을 던져 온 사람이 이제 질문마저 내려놓으려 합니다. 이것은 사유의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지점에서 찾아오는 침묵입니다.
젊음도 내려놓습니다. 명예도 내려놓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을 내려놓습니다.
“끝내, 풀지 못한 물음까지도”
여기에 이 시의 가장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인간은 평생 답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풀지 못한 질문과 함께 떠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대함은 모든 물음에 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답할 수 없는 물음을 품고 살아가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 한 생을 살아낸 사람이 / 더 깊은 곳으로 / 돌아가는 일”입니다.
‘돌아간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죽음은 이 시에서 단순한 소멸이 아닙니다.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 인간이 잠시 떠나와 있었던 더 깊은 존재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처럼 그려집니다. 그래서 숲은 죽음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근원의 공간입니다. 숲에 들어서면 인간의 세계에서 익숙했던 질문들이 사라집니다.
“숲은 아무것도 / 묻지 않았습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깊습니다.
인간의 세계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무엇을 소유했는가, 누구에게 인정받았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숲은 묻지 않습니다.
나무는 늙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시든 풀잎은 자신의 소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계절이 오면 빛을 내려놓고, 바람이 불면 몸을 맡깁니다. 자연은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인간이 잃어버린 오래된 지혜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했지만, 숲에서는 존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무에게 젊음과 늙음은 우열이 아니고, 잎이 피고 떨어지는 것은 성공과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순환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나뭇잎 하나”는 시인 자신이 됩니다.
“소슬바람 나부끼는 / 청명한 가을날 /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 듯”
이 장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받아들임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떨어지면서 자신의 존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나무와 계절의 질서 속으로 돌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세상을 내려놓으며 / 죽음 너머의 / 긴 침묵으로 들어가렵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시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시의 절제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긴 침묵”이라는 말로 남겨둡니다.
그 침묵은 공허한 침묵이 아닙니다. 평생 말하고 생각하고 질문해 온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한 침묵입니다. 수많은 책과 문장과 사상을 통과한 뒤에 찾아온 침묵이기에, 그것은 말보다 깊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미지로 남깁니다.
“삶이 지나간 자리에 / 빛은 그림자를 남기고 / 한 줄의 바람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자기 소멸의 선언입니다. 빛은 사라지면서 그림자를 남깁니다. 한 인간의 삶도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그 사람이 걸어간 길과 남긴 문장과 마음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흔적조차 크게 남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기념비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름으로 오래 기억되기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줄의 바람”이기를 바랍니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나뭇잎을 흔들고, 숲을 지나가며, 지나간 자리의 공기를 바꿉니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되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마지막 인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온 인간이 마지막에는 자신을 비워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평생 답을 찾던 인간이 마지막에는 풀지 못한 물음까지 내려놓는 것. 평생 말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던 인간이 마지막에는 말보다 깊은 침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숲으로 가는 길」에서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 이전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문명을 모두 통과한 인간이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시인은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명예에서 무명으로, 말에서 침묵으로, 소유에서 비움으로, 질문에서 받아들임으로 걸어갑니다.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시인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마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이 시의 대답일 것입니다. 한 인간이 평생 걸어온 길의 마지막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세계를 완전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세계 앞에 조용히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 시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이 아니라, 한 생이 오래 걸어온 길이 마침내 숲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귀환입니다.
시인은 이제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사상을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자신이 풀지 못한 물음에 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무가 나무로 존재하듯,
바람이 바람으로 지나가듯,
떨어지는 잎이 떨어지는 잎으로 계절을 완성하듯,
한 인간도 한 생을 다 살아낸 뒤 자신의 존재를 자연과 시간의 깊은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숲으로 가는 길」은 죽음의 시라기보다 귀환의 시입니다. 그리고 그 귀환은 패배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평생 인간을 묻고, 인간을 사로잡은 세계를 묻고, 자유를 묻고, 문화의 뿌리를 묻고, 끝내 존재의 근원을 물었던 한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묻지 않는 곳으로 갑니다.
말의 끝에서 침묵으로, 문명의 끝에서 숲으로, 삶의 끝에서 죽음 너머로,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깊은 존재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름도, 명예도, 책도 아닙니다. “한 줄의 바람.” 그 바람이 지나간 뒤 숲은 다시 고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뭇잎 하나가 흔들렸던 자리에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남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 시인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더라도, 한 사람의 마음을 잠시 흔들어 놓은 바람. 한 시대의 질문을 한 줄의 문장으로 남겨 놓은 바람. 그리고 마침내 자신마저 내려놓고 숲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바람. 「숲으로 가는 길」은 바로 그 마지막 한 줄의 바람을 향해 걸어가는 한 인간의 조용하고도 장엄한 귀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와 글=김한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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