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현실로 걸어 나온 인간의 꿈
밀란 쿤데라는 인간이 꿈꾸는 세상이 모두 소설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가 아주 우연한 순간에 그 둥지를 박차고 나와 현실의 세계를 급격하게 혹은 완만하게 바꾸어 놓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만들어낸 언어와 서사구조는 단순한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인간의 정신적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실제로 그러하다.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먼저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왔다.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라는 오늘날의 가치도 처음부터 현실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 먼저 탄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소설 속 인간은 현실의 인간보다 자유로울 때가 있다. 그는 국가의 통계도 아니고 계급의 표본도 아니며 이념의 부속물도 아니다. 하나의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고뇌하고, 선택하고, 실패한다. 근대 문명이 발견한 ‘개인’이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럽이라는 공간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의 존엄, 사적 삶의 보호, 창의적 사고와 표현의 자유, 법 앞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 서유럽 근대문명이 남긴 유산을 빼놓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럽 문명은 처음부터 자유와 인권의 문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럽의 역사는 개인이 집단과 신분, 종교와 국가의 지배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까지의 길고 험난한 과정이었다.
중세의 봉건적 신분질서와 교회의 권위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 어려웠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을 다시 발견했고, 종교개혁은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문제를 제도적 권위의 바깥으로 끌어냈다. 과학혁명은 세계를 설명하는 권위를 전통과 교리에서 관찰과 이성으로 이동시켰으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변화가 축적되면서 마침내 근대의 핵심적인 질문이 등장했다.
국가와 교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국가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근대 유럽을 움직인 가장 중요한 정신적 전환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서 유럽 문명을 찬양하는 것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유럽은 개인의 자유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 그 자유를 부정했다. 유럽 내부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말하면서 유럽 밖에서는 타인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중성이 존재했다.
유럽 문명의 역사는 이처럼 영광과 폭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사였다. 오래된 성곽과 궁전, 성당과 대학, 박물관과 극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문명의 찬란한 외형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건축물을 세운 것은 왕과 귀족의 명령이었지만, 실제로 돌을 나르고 벽을 쌓은 것은 이름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유럽의 문명은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만의 산물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조차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유럽 문명의 진정한 가치는 찬란한 외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불평등과 폭력까지도 끊임없이 문제 삼아 온 자기비판의 전통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문명 밖에서 갑자기 떨어진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유럽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럽 스스로 비판하면서 탄생한 사상적 산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의 빈곤과 열악한 노동환경,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극심한 불균형은 인간의 자유가 경제적 조건 없이 완성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출발점에는 분명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개인의 해방을 목표로 했던 이념이 국가권력과 결합하면서 오히려 개인을 거대한 집단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는 역설이 발생했다.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상이 하나의 국가적 목표로 고정되면서, 그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의 자유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 인간을 해방시키겠다는 이념이 인간을 통제하는 국가의 논리로 변질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사의 중요한 역설을 발견한다.
개인을 억압하던 전통적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탄생한 근대의 사상이,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이념도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자신을 절대적 진리로 선언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자유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장과 국가, 다수와 소수, 안보와 자유 사이의 긴장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자유를 표방하는 체제에서도 개인의 권리는 쉽게 침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어느 한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이다.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체제 전환은 이러한 역사적 역설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많은 국가가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다당제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체제의 변화만은 아니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역사적 재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자유가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국가권력은 다시 강해지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정치권력이 그 위임의 범위를 넘어 개인의 삶과 사적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국가안보, 경제발전, 사회적 평등, 공동체의 질서라는 명분은 때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다수의 의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개인의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깝다.
개인의 생명과 존엄, 사상과 표현의 자유, 창의적인 사고의 자유, 그리고 국가가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사적 삶의 영역은 정치권력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삶의 공간이다. 그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민주주의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민주주의의 정신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전쟁과 국제적 갈등이 심화되는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보여준 국가폭력의 비극이나 중동에서 반복되는 군사적 충돌은 모두 거대한 국가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는 전쟁을 선언하지만, 전쟁의 대가는 결국 개인의 삶이 치른다. 그래서 우리가 유럽 문명에서 주목해야 할 것도 단순히 유럽의 역사적 영광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겪어 온 권력과 개인 사이의 긴장, 자유와 질서 사이의 충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성찰해 온 과정이다. 유럽은 완성된 문명이 아니라 실패하면서도 자신을 수정해 온 문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인들에게 하나의 상상의 공간이 되었다. 오래된 성곽과 대학, 예술과 철학의 전통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권위에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럽이라는 이름은 지리적 공간보다 하나의 정신적 질문에 가깝다. 인간은 국가보다 먼저 존재하는가. 개인은 집단의 목적을 위해 희생되어도 되는가. 권력은 어디까지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근대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개념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더욱 절실해졌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국가는 안보와 효율성을 이유로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며, 거대한 플랫폼과 자본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을 데이터로 환원한다. 과거에는 국가권력이 개인을 통제했다면 이제는 국가와 시장, 기술과 데이터가 동시에 개인의 삶을 둘러싸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21세기의 자유는 단순히 국가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모든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율성을 지켜내는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 소설이 등장한다. 소설 속 인간은 통계가 아니다. 그는 이념의 표본도 아니며 국가의 부속품도 아니다. 그는 하나의 독립된 삶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이다. 사랑하고, 실패하고, 욕망하고, 후회하고, 다시 선택한다. 문학이 인간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어쩌면 바로 이 개별성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한 인간을 하나의 숫자나 계급이나 국민이나 유권자로만 보지 않고,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인의 존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쿤데라의 말은 단순한 소설론이 아니라 문명론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인간은 먼저 상상하고, 그 상상을 언어로 만들며, 언어로 만들어진 세계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자유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권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도 처음에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 역시 아직 완성된 현실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하나의 꿈인지 모른다. 소설 속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꿈은 언젠가 다시 현실로 걸어 나올 것이다. 문제는 그 꿈이 어떤 세계를 향할 것인가이다.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세계인가, 아니면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인가.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세계인가, 아니면 어떤 거대한 목적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최후의 경계선으로 남겨두는 세계인가. 결국 문명의 수준은 얼마나 강한 국가를 만들었는가로만 측정할 수 없다.
얼마나 강한 권력 앞에서도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가장 근본적인 척도일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한다. 인간이 꾸는 꿈은 허구가 아니다.때로는 그 꿈이 현실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우연히 그 꿈이 소설의 둥지를 박차고 현실의 세계로 걸어 나온다. [글=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국립국어원장-한국국어정책학회장-경북대 국문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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