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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23] 언어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인가?

  • 이상규 교수 기자
  • 입력 2026.08.2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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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인가?


언어는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끄는가. 우리는 흔히 언어를 진실을 전달하는 가장 완전한 도구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언어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언어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투명한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질서를 부여하는 사회적 장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언어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질서 속에 가두는가. 이 질문은 AI 시대에 더욱 절박한 철학적 문제가 되었다.


구어가 먼저였는지, 몸짓언어에서 소리와 문자언어가 분화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언어학적으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어의 기원보다 언어의 기능이다. 몸짓과 소리, 문자와 상징은 모두 시공간을 초월하여 기억과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한 기호였다.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인 동시에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언어가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가 되었다는 데 있다.


19세기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문법과 표준어는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로 발전하였다. 문법은 단순히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규칙이 아니라 언어의 변이(variation)를 최소화하고 사회를 하나의 질서 속으로 묶기 위한 규범이었다. 특정한 어휘와 통사 구조는 ‘표준’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밖의 언어는 방언이나 비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주변부에 놓였다.


그러나 언어는 사회가 설계한 규범처럼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표준어 교육이 백 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방언은 사라지지 않았고, 세대마다 새로운 어휘와 문법이 탄생한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형되고 진화한다. 언어의 역사는 언제나 질서를 향한 힘과 변화를 향한 힘이 충돌하는 역사였다.


문학은 이러한 긴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글쓰기는 비교적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언어는 공동체가 믿는 질서를 표현하는 도구였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후 근대 사회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투명성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개인의 내면을 발견하였고, 문학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독자를 유혹하고 낯설게 만드는 형식을 선택하였다.


말라르메 이후 이러한 변화는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된다. 언어는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해체하는 대상이 되었다. 의미보다 기호가 앞서고, 전달보다 형식이 강조되었다. 문학은 현실을 묘사하기보다 언어 자체를 탐구하는 예술이 되었다.


반대로 사실주의와 사회주의 문학은 문학을 사회비판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노동과 빈곤, 계급과 불평등을 고발하는 현실 참여의 글쓰기가 등장하면서 문학은 아름다움보다 정치적 실천에 가까워졌다. 현대 문학은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두 흐름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단순히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롤랑 바르트가 『글쓰기의 영도』에서 말했듯이, 근대 이후 작가는 더 이상 공동체를 대표하는 증언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형식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형식은 단순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존재를 해석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언어의 울타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문법도, 표준어도, 문학의 형식도 모두 인간이 만든 질서이다. 우리는 언어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언어가 현실을 재구성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근원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철학에서 현실은 끊임없이 흐르는 ’지속(durée)’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 유동하는 현실을 잘게 나누어 이름을 붙인다. 문장은 체험을 해체하고, 단어는 경험을 특정 의미 안에 고정한다. 현실에는 경계 없는 강물만 흐르지만 인간은 언어를 통해 그 위에 격자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며, 경계를 설정한다.


언어는 세계를 밝히는 동시에 세계를 가린다.


이러한 문제는 AI 시대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세계를 체험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축적한 방대한 언어를 통계적으로 학습하고 재배열할 뿐이다. AI가 만들어 내는 문장은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반은 인간이 구축해 온 언어 질서이다. 다시 말해 AI는 언어를 창조한다기보다 기존 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하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의미 있는 비유가 된다.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시각의 문법을 해체하였다. 현대 문학은 언어의 문법을 해체하였다. AI는 이제 그 해체된 문법마저 다시 조합한다. 시각의 혁명과 언어의 혁명, 그리고 알고리즘의 혁명은 모두 인간이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계보 위에 놓여 있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언어는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끄는가.


만약 유토피아를 완전한 질서와 절대적 진리의 세계라고 정의한다면, 언어는 결코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 없다. 언어는 언제나 현실의 일부만을 붙잡을 뿐이며, 모든 문장은 필연적으로 해석의 여백을 남긴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수정해 가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면, 언어는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다. 언어는 진실을 완성하지 못하지만, 진실을 향한 길을 끊임없이 열어 주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한계를 성찰하는 능력이다. 진실은 문장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인간의 존재 또한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 언어는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며, 완성이 아니라 탐색이다.


유토피아는 언어가 완성하는 세계가 아니라, 언어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었지만, 언어 또한 인간을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AI 시대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넘어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윤리와 성찰일 것이다. [글=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국립국어원 원장-한국국어정책학회장-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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