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라, 태양을 마주하다
- 김한식 시인 -
너럭바위 위에 넙죽 엎드린
자라 한 마리
삼복염천의 불타는 태양은
숨을 헐떡이게 하고
폭염 중대경보를 내려도
그는 꿈쩍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목을 내밀고
땡볕 불볕으로 타는
태양을 마주한다
등껍질에는
냇물이 새겨놓은 세월이
지층으로 쌓여 있고
그 견고한 등껍질 위로
따가운 햇살이 내려 앉는다
태양은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었고
자라는 한 번도
조급한 적이 없었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
빨리 달려가는 지름길 보다는
오래 견디는 법을 배운다
졸졸거리는
성복천의 물은
소리를 자랑하지 않고
단단한 바위는 말이 없어도
세월을 품는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은
시냇가에 앉아서도
하늘보다 먼저 화면을 본다
손바닥 위의 파란 빛깔은
눈을 붙잡아두고
태양의 빛은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사람들은 빛을 소비하며 살지만
그는 이 빛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비우며
천천히 몸을 익혀 가고 있다
그 비밀한 빛은
화면보다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무거운 침묵으로 세계를 밝힌다
- 시 해설 -
김한식 시인의 「자라, 태양을 마주하다」는 겉으로는 성복천 너럭바위 위에서 일광욕을 하는 자라 한 마리를 바라본 풍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심에는 생태의 관찰이 아니라 현대 문명과 존재의 태도를 대비시키는 철학적 성찰이 놓여 있습니다. 자라는 하나의 동물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의 상징이며, 태양은 생명을 일깨우는 진리와 영원의 은유입니다. 시는 첫 행부터 강렬한 정지의 이미지로 시작됩니다.
"너럭바위 위에 넙죽 엎드린 / 자라 한 마리
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지 속에서 시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존재는 점점 얕아지고, 자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존재는 더욱 깊어집니다. 김한식은 이 역설을 통해 '속도는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며, 깊이는 기다림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라는 폭염을 피하지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목을 내밀고 / 땡볕 불볕으로 타는 태양을 마주한다."
이 모습은 단순한 일광욕이 아니라 존재가 생명의 근원과 마주하는 의식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편을 피하고 그늘을 찾지만, 자라는 생명의 원천인 태양을 향해 몸을 엽니다. 그것은 고통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빛은 때로 뜨겁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김한식의 시에서 태양은 언제나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태양은 진리이며,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을 깨우는 절대적 빛입니다. 그래서 자라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자신을 열어 두는 존재가 됩니다.
시의 중심부는 시간의 철학으로 나아갑니다. "태양은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었고 / 자라는 한 번도 조급한 적이 없었다." 이 두 행은 시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축입니다. 태양도 서두르지 않고, 자라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자연은 결코 조급하지 않습니다. 계절은 시간을 앞당기지 않고, 강물은 서둘러 바다에 도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늘 시간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김한식은 여기서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덕목 하나를 조용히 일깨웁니다.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자연이 증명해 온 존재의 법칙이 됩니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 / 빨리 달려가는 지름길보다는 / 오래 견디는 법을 배운다." 이 문장은 생존의 원리를 넘어 문명의 원리를 말합니다.
위대한 문명도, 깊은 철학도, 훌륭한 인격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래 견디고 사유하며 오래 사랑한 사람만이 깊이를 갖게 됩니다. 시인은 속도의 시대에 지속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반부에서 시는 더욱 날카로운 문명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은 / 시냇가에 앉아서도 / 하늘보다 먼저 화면을 본다." 이 세 행은 오늘의 인간을 압축한 초상입니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하고, 하늘 아래 앉아 있으면서도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인간. 몸은 자연에 있지만 의식은 알고리즘과 자극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 대목은 김한식이 《철학, 다시 오시네》에서 말한 호모 켑티부스(Homo Captivus)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현대인은 쇠사슬에 묶인 것이 아니라 화면에 붙잡혀 있습니다.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이 포획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대비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손바닥 위의 파란 빛깔은 / 눈을 붙잡아두고 / 태양의 빛은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비는 바로 두 종류의 빛입니다.
하나는 화면에서 나오는 푸른빛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지만 영혼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태양의 빛입니다. 그 빛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흔들어 깨웁니다.
김한식은 현대인이 빛을 너무 많이 소비하지만, 정작 빛을 통해 깨어나는 경험은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화면의 빛은 정보를 전달하지만, 태양의 빛은 생명을 일깨웁니다. 하나는 소비의 빛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빛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 시가 도달하는 철학적 절정입니다.
"사람들은 빛을 소비하며 살지만 / 그는 이 빛 앞에서 / 자신의 욕망을 비우며 / 천천히 몸을 익혀 가고 있다." 여기서 자라는 더 이상 자라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수행자이며, 시간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철학자이며, 생명의 빛 앞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몸을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체온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존재를 빛에 익숙하게 만드는 일이며, 욕망보다 생명을 선택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자라의 침묵은 무기력이 아니라 가장 깊은 능동성입니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작품 전체를 하나의 철학으로 응축합니다. "그 비밀한 빛은 / 화면보다 깊은 곳으로 / 우리를 이끌어 / 무거운 침묵으로 세계를 밝힌다." 시인은 세계를 바꾸는 힘이 소음이나 속도, 기술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를 끝내 밝히는 것은 오래된 빛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존재의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라, 태양을 마주하다」는 자라를 노래한 생태시가 아니라, 속도의 문명 속에서 깊이를 잃어버린 현대인을 향한 철학적 성찰입니다. 이 시에서 자라는 오래 견디는 존재의 지혜를 상징하고, 태양은 인간을 다시 깨어나게 하는 진리의 빛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화면의 푸른빛과 태양의 황금빛을 대비시키며, 인간이 무엇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끝내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오늘도 화면의 빛을 소비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태양의 빛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비우며 존재를 익혀 가고 있는가. 바로 이 물음이 이 시의 가장 깊은 울림이며, 김한식 시 세계를 관통하는 존재론적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글=시인 김한식]

BEST 뉴스
-
[이상규 칼럼 28] 역사는 과거의 풍경화가 아니라 현재의 실존적 해석이다
역사는 과거의 풍경화가 아니라 현재적 실존의 해석이다 - 문명의 계급 구조에서 한글 창제와 조선 지식인 사회의 권력까지 - 신이 지배했던 서양과 예제(禮制)와 성리학적 도학이 지배했던 동양은 서로 다른 문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의 작동 원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두 세계는 크게 다르지 ... -
[굿리더뉴스] 어느 평범한 농부의 일상 이야기...무주 부남면 방경식 씨
블루베리 밭에서 마주한 무주 부남면 방경식 씨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과 논을 오가는 농부에게 ‘휴식’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농사철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지만, 힘든 내색보다는 웃음으로 하루를 견디는 농업인이 있... -
[이상규 칼럼 29] 한글학자가 한글을 쓰기 싫은 이유?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더는.. 민음사에서 기획한 한글날 기념 책 『한글』에서 배시은 시인의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더는」을 읽었다. 이 문장을 두 묶음으로 줄이면 무엇이 될까. 문자를 습득한다는 것은 어쩌면 문자와 헤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글을 다 떼었다... -
[화제의 신간]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에 사로잡혀 사는가?.. 철학자 김한식의 '호모 캡티부스' 출간하자마자 화제..
[굿리더뉴스=하동호 기자] 철학 부재의 시대에 철학 돌풍을 몰고온 철학자 김한식이 또다시 신작을 내놓아 화제다. 인문학자, 시인으로도 유명한 김한식은 최근 '철학, 다시오시네'라는 제목의 부드러운 철학서적으로 교보문고 인문학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등극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호모 캡티부스'라는... -
[여주=남상채] 36년 한결같은 봉사와 나눔...여주 천서리막국수 윤희정 대표, 지역사회 신망 높아..
천서리막국수 윤희정 대표 부부 모습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경기도 여주시 천서리에서 36년째 ‘천서리 막국수’를 운영하고 있는 윤희정 대표. 그는 전통 음식에 대한 장인정신,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오랜 봉사와 나눔으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고 있다... -
[무주=남상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전북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
미국에서 열린 '제71회 세계축제협회(IFEA) 월드 연차 총회 및 피너클 어워드 세계대회에서 참석한 황인홍 무주군수가 금상 수상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빛을 활용한 전북 무주의 반디불이 축제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