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이렌의 노래를 지나
- 김한식 -
세이렌의 노래를 따라
길을 잃지 않도록
어린 날에는
학교와 도덕으로
젊은 날에는
신앙 공동체와
강의실이라는 일터로
이제는
늙음으로
나를 붙들어 두었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단단한 붙들림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이렌은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침몰한 배들은
언제나
노래를 따라간 배들이었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를 붙들어 온 것들은
속박이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하려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학교도 일터도
피할 수 없는 늙음마저도
세상을 떠도는 굴레가 아니라
본향으로 이끄는
은혜의 매듭이었다는 것을
한 사람의 생애란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붙들어 온
하늘의 손길을
마침내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 <해설> - 속박은 어떻게 은혜가 되는가
「세이렌의 노래를 지나」는 단순히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시가 아닙니다. 이 시는 인간이 평생 속박이라 생각하며 벗어나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자신을 살려 온 사랑이었다는 깨달음을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김한식 시 세계의 핵심인 '존재의 뿌리, 본향, 인간을 붙드는 하늘의 질서'가 가장 맑고 깊게 응축되어 있습니다.
세이렌은 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세이렌은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간을 부릅니다. 그녀들은 칼을 들지 않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욕망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세이렌은 악의 상징이라기보다 유혹의 본질입니다.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은 대부분 험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습니다. 가장 매혹적인 얼굴과 가장 부드러운 언어로 다가옵니다. 성공도, 권력도, 쾌락도, 명예도, 자유라는 이름도 때로는 세이렌의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 사실을 첫 연부터 암시합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따라 길을 잃지 않도록, 여기서 문제는 노래가 아니라 길을 잃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욕망 자체보다 방향을 잃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애를 세 시기로 나눕니다. 어린 날에는 학교와 도덕. 젊은 날에는 신앙 공동체와 강의실. 그리고 늙음. 겉으로 보면 모두 자신을 제한하는 장치처럼 보입니다. 학교는 규율을 가르치고, 도덕은 욕망을 절제시키며, 신앙은 자신보다 큰 존재 앞에 서게 하고, 직업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늙음은 더욱 잔인합니다. 이제는 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단단한 붙들림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이 한 줄에는 인간 보편의 심리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구속이 없는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생각을 뒤집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세이렌의 아름다움이다
시의 중심은 다음 대목입니다.
그러나 세이렌은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악은 대개 선을 가장합니다. 파멸은 대부분 친절한 얼굴로 찾아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고,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문명이 현실보다 더 매혹적인 가상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알고리즘과 소비문화 역시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따라가도록 만듭니다. 바로 세이렌처럼.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은 짧지만 무겁습니다.
침몰한 배들은 언제나 노래를 따라간 배들이었습니다. 배를 침몰시킨 것은 폭풍이 아니라 노래였습니다. 이 한 문장은 현대문명 전체를 향한 은유처럼 읽힙니다. 사람은 폭력보다 유혹에 더 쉽게 무너집니다.
속박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시는 후반부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 줍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 짧은 한 줄은 시 전체를 뒤집는 문장입니다. 평생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자신을 살려 온 사랑이었다는 깨달음. 학교도. 직업도. 신앙도. 늙음도. 모두 자유를 빼앗은 족쇄가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배려였습니다. 특히 다음 표현은 이 시의 핵심입니다. 본향으로 이끄는 은혜의 매듭 '매듭'이라는 말이 참 아름답습니다. 매듭은 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풀리지 않도록 지켜 줍니다. 배의 닻줄도 매듭이고, 등반가의 생명줄도 매듭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매임을 요구합니다. 부모와 자식도, 부부도, 스승과 제자도, 신앙도, 모두 보이지 않는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 매듭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늙음이라는 마지막 은총
이 시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늙음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대부분의 시가 늙음을 상실로 노래한다면, 김한식은 늙음을 마지막 붙드심으로 이해합니다. 젊음은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늙음은 멈추게 합니다. 멈춤은 인간에게 질문을 돌려줍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늙음은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돌려주는 은혜입니다.
하늘의 손길을 알아보는 생애
마지막 연은 이 시를 단순한 신앙시에서 존재론적 성찰의 시로 끌어올립니다.
한 사람의 생애란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붙들어 온
하늘의 손길을
마침내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장이란 독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성숙은 독립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혼자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붙들어 주고 있었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한 인간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자유를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사랑의 붙드심을 이해하게 되는 시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끝내 지나온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노래가 아니라, 평생 자신을 붙들어 온 하늘의 침묵입니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그 침묵을 은혜의 매듭과 하늘의 손길이라는 두 개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며, 인간의 생애는 결국 자유를 획득하는 여정이 아니라 자신을 살려 온 사랑을 뒤늦게 알아보는 여정임을 깊고 묵직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BEST 뉴스
-
[이상규 칼럼 28] 역사는 과거의 풍경화가 아니라 현재의 실존적 해석이다
역사는 과거의 풍경화가 아니라 현재적 실존의 해석이다 - 문명의 계급 구조에서 한글 창제와 조선 지식인 사회의 권력까지 - 신이 지배했던 서양과 예제(禮制)와 성리학적 도학이 지배했던 동양은 서로 다른 문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의 작동 원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두 세계는 크게 다르지 ... -
[굿리더뉴스] 어느 평범한 농부의 일상 이야기...무주 부남면 방경식 씨
블루베리 밭에서 마주한 무주 부남면 방경식 씨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과 논을 오가는 농부에게 ‘휴식’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농사철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지만, 힘든 내색보다는 웃음으로 하루를 견디는 농업인이 있... -
[이상규 칼럼 29] 한글학자가 한글을 쓰기 싫은 이유?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더는.. 민음사에서 기획한 한글날 기념 책 『한글』에서 배시은 시인의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더는」을 읽었다. 이 문장을 두 묶음으로 줄이면 무엇이 될까. 문자를 습득한다는 것은 어쩌면 문자와 헤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글을 다 떼었다... -
[화제의 신간]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에 사로잡혀 사는가?.. 철학자 김한식의 '호모 캡티부스' 출간하자마자 화제..
[굿리더뉴스=하동호 기자] 철학 부재의 시대에 철학 돌풍을 몰고온 철학자 김한식이 또다시 신작을 내놓아 화제다. 인문학자, 시인으로도 유명한 김한식은 최근 '철학, 다시오시네'라는 제목의 부드러운 철학서적으로 교보문고 인문학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등극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호모 캡티부스'라는... -
[여주=남상채] 36년 한결같은 봉사와 나눔...여주 천서리막국수 윤희정 대표, 지역사회 신망 높아..
천서리막국수 윤희정 대표 부부 모습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경기도 여주시 천서리에서 36년째 ‘천서리 막국수’를 운영하고 있는 윤희정 대표. 그는 전통 음식에 대한 장인정신,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오랜 봉사와 나눔으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고 있다... -
[무주=남상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전북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
미국에서 열린 '제71회 세계축제협회(IFEA) 월드 연차 총회 및 피너클 어워드 세계대회에서 참석한 황인홍 무주군수가 금상 수상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빛을 활용한 전북 무주의 반디불이 축제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