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훈적을 너무 부풀려 쓴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 비문(414)은 고구려 기록으로 비교적 오래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쓰기는 변체한문(Brocken Chainese) 글쓰기의 모습이다. 홍기문(1957)이 이 비문의 변형적 글쓰기를 이두식으로 규정한 것을 계기로 너무나 당연히 이두식 글쓰기였으며, 이것이 신라로 전파되어 신라의 이두 글쓰기로 발달되었다는 견해가 일반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주변지역(숙신, 부여조선, 동호, 선비, 고구려, 발해, 거란 등)의 비문 서사자의 한문 능력에 따라 이런 변체문이 비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가문(1981)이 지적한 “買人制合守墓之(사들인 사람은 수묘를 하도록한다)”에 '之'의 사용법이 한문 문법에 틀린 것이라고 하면서 신라 이두에 나타나는 종결형(-다)라 하였다. 신라 이두는 이보다 약 백년 이후에 나타날 뿐 아니라 목적어 아래서나 문종결형 모두 중국 한문에서도 나타나는 변체문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를 이두로 규정하기란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 이 ‘之’는 일본고대 금석문에도 보인다.(小川環樹, 1980) 앞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고구려 이두가 백제나 혹은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광개초대왕 비문의 서사자는 당시 한문 글쓰기에 능했을 사람이었지만 변체한문의 일부 나타난 약간 능숙하지 않은 서사자였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 변방의 제 종족들의 한문 글쓰기의 수준을 읽을수 있는 잣대가 된다. 이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고구려 이두가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는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신중을 기할필요가 있다.
이러한 북방에서 남방으로 일방적으로 한문과 한자 글쓰기의 인접전파의 논리가 굳어지면서 신라가 고구려에 비해 2-3세기 늦게 한문이 전파되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가 정착되었다. 광개토대왕비문 보다 약 백여년 뒤늦은 시기에 나타난 “포항중성리비”, “울진봉평비”, “영일냉수리비”에서는 백제나 고구려의 한문식 글쓰기가 아닌 신라 독자적인 이두식 글쓰기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을 자료들이 통일신라로 넘어가서도 자속적으로 신라식 이두 글쓰기 방식이 점점 발전되어 고려로 뛰어넘고 지역적으로도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주체적 글쓰기의 발전 면목을 무시하며 오히려 한문 글쓰기가 더뎠다는 반문화적 기억이 지배되도록 만든 이유를 충분히 더 밝혀내야 할 것이다.
비문은 각별한 형식, 부풀려진 과장과 허풍, 어려운 문구 현학적 표현, 권력의 광기가 뒤섞인 역사적 꾸정물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최근 김태식 기자가 쓴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비평을 읽으니 속이 시원해진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 했는데 과연 부여가 단일한 족속들의 집단이었을 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몽골 중화 한반도 그리고 연해주에 둘러싸인 만주퉁구스의 주역은 역시 여진 곧 만주였다. 그러나 이 만주는 동호선비에서 번진 말갈, 송화강 주변의 숙신(주센), 연해주 방면의 읍루(우저), 요동 방면의 북위, 연, 구리, 한반도 함경도 방면의 동해여진(고대 예맥, 옥저)이 용호상박의 기세로 무리를 지우며 다시 해체하며 시간의 흐름 위에 역사의 누각을 지었다.
광개토대왕비에 북대황지역 토벌 지명이 한자로 써였다고 한국표음으로 읽으면서 이들지역이 모두 우리 민족의 고대의 터전이라고 착각에 빠찐 이들이 한 둘이 아니며 심지어 백제나 신라가 요동성 서쪽에 있었다는 환영에 빠진 이들도 한 둘이 아니다. 우린 왜 북대황을 그토록 그리워할까?
고대 발조선, 한사군, 고리, 보하이, 키탄, 쥬센, 금, 다이칭 제국으로 이어져 왔다. 그 어느 시점에 한반도에서 동북삼성의 일부에 고리라는 제국은 한반도 동남쪽 신라로부터 토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고리에 뛰어난 광개토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장수왕이 남긴 아버지의 공훈 추모비에 저 북만주에서 한반도와 바다 건너 왜까지 신민으로 지배했단다. 마치 중국이 조선을 번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처럼 느슨한 지배 체제를 마치 예속된 속국이라고 과장한 그 비문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할 것인가?
그 비문은 SOV어순 체계였던 만주 퉁구스와 한반도와 같았던 고리국의 변종 한문임에도 신라식 이두를 배태한 원조로 화장을 칠한다. 그래서 고구려 이두가 백제로 다시 신라로 전파되었다는 학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신라는 이두를 더욱 발전시켜 향찰을 만들어내었는데 그동안 고구려와 백제는 뭘 했나? 고구려나 백제는 오직 한문을 숭상하는 속도가 빨랐을 뿐이다. 신라에 비해 그렇다고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나 백제 사람들보다 한문 도입이 늦었다고?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결과는 달리 설명할 수 있다. 한문 학습 능력이 부족해서 “포항중성리비”나 “울진 봉평비”나 “냉수리비”가 변형된 한문 곧 이두로 썼다는 말인가?
신라는 중화주의의 물에 천천히 빠져들었을 뿐 대단히 주체의식이 강한 탓으로 그들의 글쓰기는 고구려나 백제와 다른 그들 독자적인 이두와 향찰 곧 신라식 글쓰기를 발전시켜 고려와 조선까지 이두 글쓰기를 이어주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 말하는 방식을 표음할 수 있는 한글 곧 훈민정음의 창체 토대를 이루어낸 것이다. [글=이상규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전 국어정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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