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時計), 시간 밖의 세계로 이어진 시(詩)
바람의 시간과 공간 계절이 얼마나 더 영글어졌는지 내 눈썹을 쓰쳐지나는 바람, 오래된 냄새에 버물러진 흩어져 날리는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휘감다가 사라진다. 세월의 지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색상과 흩어져 있던 사물의 형상은 바람에 어울려 쓰치며 지나친다. 단 한번도 손으로 웅켜잡지 못했던 욕망이 연기처럼 부서러진 바람, 눈에 보이지 않는 기호로 지난 시간을 살짝 실어왔다 금방 다시 돌아가버리면 더욱 애닯다. 시간과 공간 가득 채운 시적 프네우마, 왜 미래로 이어진 과거 시간을 순간 순간 해체하는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가 잉태한 산업문명의 총아로 시계와 기차를 상징화한다. 시간과 공간의 확장으로 사실화에서 추상화의 풍경으로 건너는 근대의 풍경화를 찰칵거리는 시계의 톱니바퀴로 동력을 전달하는 인류문명의 총아로 시계를 손꼽을 수 있다. 그 시계는 시인이 사물을 언어로 세우는 일과 닮았다. 시계는 새로운 문명 질서의 탄생을 생각과 사상의 집을 우리 곁에 당겨왔다. 실존적 거리의 지표이자 태양의 빛과 어둠 속에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는 달빛과 교직으로 엮어내는 시간은 인간 존재를 응시하는 잣대이다.
인간 육체의 죽음이라는 삶의 종말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시간의 단절은 존재했던 한 우주의 종말이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였으니 시간에 집요한 애착을 갖는다. 손목을 치장하는 악세서리가 아닌 생존의 무거운 무게가 매달린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분절하는 도구이자,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이다. 존재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詩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시체를 미라로 만들고 영혼은 별로 재생된다고 믿은 것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불교에서 윤회전생을 교설하는 것, 그리스도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천국'을 역설하고 거기에서 고통 없이 살고자 하는 것도, 심지어 철학적으로 시간의 비실재성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갱생更生에 대한 절실한 소망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찰칵 찰칵, 시작도 끝도 없이 영속하는 시간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망하고 갈구하는 그 영원은 어디 있는가? 영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 이후를 불변의 영원이라고 한다. 영원으로 덜려가는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엄격하게 말하면 거기는 무시간, 즉 시간 밖이다. 무의 세계와 이어진 비 존재의 세계를 내왕하는 언어의 다리인 한 편의 시다. 시간은 황혼길에 접어든 자의 주제, 아니 최후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에 접속하는 시간은 인간 삶의 마지막 경계의 표지이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여러 주와 공국들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새롭고 상세한 지도와 도로 표지판이 고향 마을을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 여행자들을 안내했다. 새로운 추시계의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는 사회의 심장박동이 되었다. 사람들의 주머니 속과 거실, 시청과 교회 탑 위의 시계 문자판에 달린 시곗바늘은 시시각각 더욱 정확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새로운 시계들은 모든 사람에게 먹을 때와 일할 때, 기도할 때와 잠잘 때를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시계 소리라는 새로운 합창곡에 맞춰 움직이게 되었고, 삶은 가속화되어 점점 더 빠르고 예측 가능하며 합리적으로 변해갔다. 헤겔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좌우명은 "모든 것에는 쓸모가 있다“였다. 예나 학파는 이 모든 과학적 창의성, 생산성, 유용성의 부작용으로 인류가 이성에만 집중하게 된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현실에서 시詩와 영성과 감정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썼다. "자연은 단조로운 기계로 축소되었다. 영원히 창조적인 우주의 음악 싸이 거대한 풍차의 반복적인 소음으로 변해버렸다." 17세기 후반의 영국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는 인간의 정신이 백지 상태로 출발해 평생 동안 감각적 경험에 따른 지식으로만 채워진다고 주장한 반면, 예나 학파는 상상력도 이성과 합리적 사고만큼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몸이 소멸하면 존재도 또 그 존재를 명명하던 언어도 결국 사라진다.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다 본다. 바람이 언어다. 내 몸과 교감하는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닌 더구다나 텍스트도 아니다. 음성언어와 문자 텍스트 언어에 유폐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몸짓의 언어와 자연 존재들이 발신하는 언어가 파동으로 전파로 쏟아지는 원시의 계곡으로부터 높은 빌딩이 숲을 이루는 이 도심 속에서 내 몸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언어가 훨씬 더 다양하고 많다. 샤를 보드레르는 "문인은 세상의 적"이라고 했다. 문인 가운데 시인이라는 이름은 세상을 전복 해체하는 변사라고 할 터인데 실제 인간의 삶을 제대로 바꾸어내지 못했다는 자책의 말이 아닐까? 인간 자체가 이성적 존재의 본질에 도달하는 험난한 길 위에 있으니 손에 쥔 것이라고는 말 밖에 없다. 시는 말 가운데 마법을 지닌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시라고 하더라도 진실의 유통기간은 그리 길지 않고 우리 삶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T.S. 엘리엇은 능숙하고 세련된 시인들의 언어는 모방하고 훔쳐 온 시어라고 했다. 목로주점에 앉아 술병도 함께 자지러지는 듯한 슬픔을 뱉는다. 술병이 구르듯이 외로움에 취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뜯어먹는 가난한 시인은 시를 사랑하며 시로 세상을 노래하며 스잔한 이 시대의 시간들을 혼불로 불태운다. 시간 밖의 시간으로 이끌어내는 시계와 시인은 닮았다.

필자 이상규 교수는 국내 최고의 국어국문학자이다. 국립국어원 원장, 국어정책학회 회장,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로 고향 대구에서 집필과 후진 양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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