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대법원이 사기죄에 대해 새로운 판결을 내려 주목을 끌고 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계약상의 거짓말은 곧 사기죄'라는 등식을 깨고, "계약 체결의 본질적 사항에 대한 기망이어야 사기죄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민사와 형사의 경계를 다시 한번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계약 과정에서 일부 사실과 다른 설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약의 본질적 내용이 아니라면 곧바로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민사적으로 해결 가능한 분쟁에 국가 형벌권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부산 중구에서 노래자랑 행사를 주관하는 한 사단법인 이사장인 A씨는 2023년 8월 B씨로부터 행사 기부금 명목으로 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행사가 실제로는 C광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음에도 A씨가 "D공원에서 행사를 개최하는데 기부금을 내고 대회장을 맡아달라"는 취지로 말해 기부금을 받아냈다고 판단했다.
1심과 2심은 A씨의 행위가 기망에 해당한다고 보고 사기죄를 인정했다. 특히 B씨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행사가 D공원에서 열리는 것을 조건으로 기부금을 냈다"는 취지로 일관되게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사기죄의 보호법익은 재산권"이라며 "재산권과 무관한 기대·이익의 침해 또는 계약 위반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재산권 처분과 관련한 계약 체결이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계약 내용 중 허위로 설명된 부분이 사기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문제가 된 사항이 계약의 본질적 요소인지, 아니면 부수적·비본질적 요소인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그 위반으로 인해 계약 내용대로 이행되더라도 계약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여야 계약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행사가 C광장에서 열리느냐 D공원에서 열리느냐의 문제가 기부 행위의 본질적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A씨가 행사 자체를 개최하지 않을 의도였거나 기부금을 편취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꾸며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사기죄는 단순한 거짓말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망행위로 인해 상대방이 착오에 빠지고, 그 착오 때문에 재산을 처분했으며,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 특히 허위 설명이 상대방의 재산 처분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이번 사건에서도 쟁점은 "D공원 개최"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B씨가 기부금을 내지 않았을 것인지 여부였다. 대법원은 행사 장소가 기부금 지급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계약상 분쟁의 형사사건화를 경계하는 최근 대법원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은 최근 투자계약, 사업계약, 용역계약 등 다양한 거래 관계에서 단순한 계약 불이행이나 약속 위반만으로 사기죄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계약 체결 당시부터 상대방을 속여 재산을 편취할 의사가 있었는지를 엄격하게 심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실제 사업을 추진할 의사나 능력이 전혀 없으면서 투자금을 받은 경우, 존재하지 않는 자산을 판매한 경우 등은 사기죄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사업은 실제로 진행됐지만 행사 장소 변경이나 진행 방식 일부 수정처럼 계약의 부수적 조건에 관한 분쟁은 원칙적으로 민사 영역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
대법원은 판결에서 "계약의 비본질적인 부분과 관련된 분쟁은 민사적 분쟁 해결 수단에 의하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며 "형사사법의 잣대를 들이대어 최후적·보충적 규제 수단인 국가형벌권 행사를 통해 개입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계약상 거짓 설명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사기죄를 인정할 수 없으며, 해당 내용이 계약 체결의 본질적 사항인지 여부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사례로 평가된다. 아울러 민사와 형사의 경계를 재확인하며 형법의 '최후수단성(보충성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한 판결로 주목받고 있다. [굿리더뉴스=남상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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