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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12]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의 시비(詩碑) 앞에서 마주친 우리 역사는...

  • 이상규 교수 기자
  • 입력 2026.06.2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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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비1-1.jpeg

 

수성못의 이상화 시비 앞에서 요원의 역사와 마주치다


어제 저녁 대구 수성못에 있는 이상화 동산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있는 시비(詩碑)를 찾았다. 너무 잘 알려진 시이지만 어둠 속 먼 달빛에 음각의 글씨가 포실포실 몸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에서 처럼 뛰어난 수사적 표현은 모던한 시적 표현이다. 왜 이상화는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고 했을까? 지금 나의 땅이 일제 치하로 굴러떨어진 처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동행했던 문학평론가 변학수 교수가 이 시에 제1연과 제11연이 수미상관으로 묘사되었는데 여기에 “ㅡ”을 두고 열띤 강의가 시작되었다.


(제1연)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제11연)

“그러나 지금은 ㅡ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무심히 스쳐지날만 하다. 줄표 ㅡ는 횡서에서는 따니 ㅣ이다. 시에서 줄표가 무슨 기능을 하였을까? 잠시 쉬는 쉼표의 기능을 뛰어넘어 역사적 시간의 무늬가 담겨있다.


벤야민이 "s c h w a c h e"라는 한 단어를 띄어쓰기를 한 것을 그냥 “약한”이 아니라  한국어로는 "야 ㄱㅎㅏㄴ" 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처럼 기표상의 "역한"이라는 의미 외에도 다른 다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어에서 줄표 ㅡ 의 의미는 벤야민이 말하는 시간의 개념과 맞닿아 있는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줄표 안에 엄청난 기의가 함의되어 있다.


우리말에는 서구 문법처럼 3가지 시제가 갖추어진 언어가 아니었다. 벤야민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점선이나 성좌라고 했다. 즉, "schwache"에서 문자 사이의 빈 공간이 있으며, 그 빈 공간에는 매 순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틈이 열려 있다는 말처럼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줄표 사이에는 메시아가 들어설 수 있는 작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Also sprach Zarathustra”에도 ㅡ를 곳곳에 사용하고 있는데 변학수 교수는 “생각의 여운”이라고 명명하면서 그런 의미를 살리기 위한 부호라고 하였다.  이처럼 시에서 자간이나 어휘 사이의 간격이나 줄표 표기의 표현을 아무렇게나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사건들의 "크고 작음을 그리고 중대함을 의식하지 않고 해석해서는 않될 일이다.


이상화 시비 2-1.jpeg

 

이상화의 돌비석을 어루만지며 옴팍 파인 글쓰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상화의 시 정신을 몸으로 그 전율을 느껴보았다. 약간 사늘한 봄바람에 손끝이 아려왔다. 이 작은 줄표 하나가 나타내려고 한 시인의 심경이 옳바르게 판독됨으로서 한 편의 시,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상실'되지 않는 역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불멸의 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비로소 나에게 다가와 한 편의 역사로 안겼다."역사는 구원된 인류'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나 시간 개념을 이야기할 때 직선의 linear 시간으로 설명하곤 한다.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의 직선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줄표 하나에 그 공간에 시간의 별자리들이 꼭꼭 채워져 있다. 


벤야민은 서구적 시각으로 시간을 선적으로 파악했지만 동양이나 인디언들의 시간 개념처럼 윤회사상의 형상처럼 원처럼 돌고 도는 순환적 circular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로 연결되는 직선형이 아나라 과거가 다시 미래와 연결되는 환상의 관점에서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사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역사에 남는 일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넘쳐난다. 


우라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절반은 이미 꼽추 난쟁이가 망각의 창고로 가지고 가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은 점선으로, 혹은 성좌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줄표나 점선 혹은 성좌에서 빈 공간은 망각을 의미한다. 어떤 과거는 기억하고, 어떤 과거는 이미 망각의 창고로 보냈으니 기억 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건들을 그것들의 크고 작음을 구별 하지 않고 헤아리는 연대기 기술자"와 같이 기억할 수는 없다. 어떤 사건들은 우리 기억과 역사에서 아주 크게, 또는 작게 기 억되거나, 또는 아예 잊혀지기도 한다. 우리 각자의 개인사를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오래전의 어떤 과거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반면, 수많은 다른 과거는 이미 잊혀진 것들도 많다. 때로는 1 주일 전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 바로 어제 먹었던 음식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지 않은가. 또는 잊혀졌던 과 거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과거를 전부 다 헤아리고 과거에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역사에서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믿고 있다.


한 편의 시에 작은 줄표 하나가 품고 있는 시간 개념은 메시아적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 줄표 하나가 유지하는 빈 공간은 매 순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안간의 소망과 염원이 담길 빈틈이기도 하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빈틈없이 연결된 연속성 있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빈틈이 벌어져 있으며, 메시아가 도래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벤야민은 "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고 했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 순간순간이 인용 가능하게 될 거라는 뜻이다"라 고 쓰고 있다. 즉, " 최후의 심판날"이 되었을 때, 신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인용되고 언급 될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구원되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시간들이 완전하게 기억되고 기록되고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 앞에 선 최후의 심판날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과거에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역사에서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가 가능해진다는 메시아니즘적인 시간 개념인 것이다. 한 편의 시 속에 이처럼 오묘한 역사적 참된 목소리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상규 국어학자.jpg

 

필자 이상규 교수는 국내 최고의 국어국문학자이다.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립국어원장, 국어정책학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로 고향 대구에서 집필과 후학 양성중이다.

 

변교수 1-1.jpeg
문학평론가 변학수 교수의 번역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북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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