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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일의 기획시리즈 18] 통합정치를 실천한 세계의 리더 20인.. 한국의 통합정치인은...

  • 유재일 교수 기자
  • 입력 2026.05.19 09:25
  • 글자크기설정

통합정치.png

 

〔기획시리즈 18〕 통합정치와 리더십

- 통합정치를 실천한 세계의 리더 20인과 두 사례 -

 

유재일(사회공헌연구소 대표)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이기적으로 사는 길

 

정치지도자는 누구인가? 가장 간명하게 말하면, 그는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politician)이자, 추종자들(followers)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수장(head)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현대 정치리더십 연구의 대가인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1918∼2014)는 <리더십>(Leadership, 1978)에서 보편적 개념의 리더십을 “리더가 사람들이 공유하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제도적, 정치적, 심리적, 기타 자원을 동원해 추종자들의 동기를 자극하고, 참여시키고, 만족시킴으로써 발휘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정치지도자는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고대 영국 이케니족의 부디카 여왕(30∼61)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대담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패배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카시우스 디오(165∼235)의 <로마사>(235)에 따르면, 그녀는 전투에 앞서 “우리가 아직 자유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의무를 다해 자녀들에게 자유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실체까지 물려주도록 합시다”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1908∼1973) 역시 쿠데타군이 탱크와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마친 뒤 자결한 인물이다. 파트리시오 구즈만(1941∼)의 다큐멘터리 <칠레 전투, 무기 없는 민중의 투쟁>(1976)에는 아옌데가 “나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로운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해 나갈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릴 것임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하는 비장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 두 사례는 겉으로는 한 인간의 영웅적 장엄미(莊嚴美)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은 정치지도자의 윤리적 선택, 나아가 정치의 본령이 과연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하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정치지도자는 공동체의 존립과 가치, 나아가 구성원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야 하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함께 지닌 존재다. 따라서 그는 투쟁과 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시대적 가치와 과제라는 공공선을 실현하고, 수많은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성과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되돌려지지 않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지도자는 진실, 용기, 관용, 통찰이라는 정치적 덕목을 갖추고 통합정치를 실천해야 할 이유가 도출된다.

 

만델라 1-1.jpeg

 

필자는 이 시리즈에서 통합정치를 “정치공동체 내에서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과 협력의 두 축을 바탕으로 정치행위자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라고 전제했다. 그리고 G20 국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치리더십 사례를 살펴보며 통합정치에 관한 한국적 시사점을 모색하고자 했다. 특히 졸저 <통합정치와 리더십>(2024)에서 중점으로 분석한 ‘통합정치를 실천한 세계의 리더 10인’, 즉 ① 중국의 쑨원 대총통(1866∼1925), ②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 ③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1889∼1964), ④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1916∼1996), 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1918∼2013), ⑥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1924∼2025), ⑦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1953∼), ⑧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1924∼2009), ⑨ 브라질의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1945∼), ⑩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1954∼) 등의 통합적 리더십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통합정치가 실천될 수 있는 조건과 과제를 되짚어 보았다.

 

책 1-1.jpeg

 

물론 이러한 시도가 보다 설득력 있고 적실성 있는 ‘설명 기제’(explanatory mechanism)가 되기 위해서는 통합정치를 실천한 정치지도자의 사례를 보다 폭넓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다음 <표>와 같이 G20에서는 ①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총리(1919∼2000), ②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1957∼), ③ 멕시코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1953∼) 등 3인을 추가하고, G20 외에서는 ①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 총리(1885∼1946), ② 베트남의 호찌민 국가주석(1890∼1969), ③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1936∼2011), ④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1929∼2004), ⑤ 라이베리아의 엘런 존슨-설리프 대통령(1938∼), ⑥ 칠레의 미셀 바첼레트 대통령(1951∼), ⑦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1980∼) 등 7인을 포함해 모두 20인의 정치리더십을 비교·분석해 보았다. 이는 다음 <시리즈 19>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리더십 분석을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하다.

 

구분

리더

주요 업적 및 종합 평가

정치리더십 덕목

국가 / 정부수반

정부수반

재임기간

진실

용기

관용

통찰

G20

중

13개

국가

1

중국의 쑨원(1866-1925)

1911-1912

삼민주의 제창, 공화주의 혁명, 국공합작

<중국혁명의 선행자>

A+

Ao

B+

B+

2

미국의 F. 루스벨트(1882-1945)

1933-1945

뉴딜=정부+자본+노동,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진보와 자유의 전사>

Ao

A+

B+

Ao

3

인도의 네루(1889-1964)

1950-1964

비폭력 독립운동, 파괴보다 국토 분할 선택

<현대 인도의 건축가>

S

A+

B+

Ao

4

캐나다의 P. 트뤼도(1919-2000)

1968-1979,

1980-1984

다문화주의(이중언어 사용), 동성결혼 합법화

<진보적 자유주의의 총아>

Ao

Ao

Ao

Ao

5

프랑스의 미테랑(1916-1996)

1981-1995

국민의 삶의질 변화, EU 단일화폐 성사

<유럽통합의 완결자>

Ao

A+

Ao

S

6

남아공의 만델라(1918-2013)

1994-1999

비폭력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진실과 화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A+

A+

S

B+

7

일본의 무라야마(1924-2025)

1994-1996

대연정=진보+보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사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순회하는 인생>

A+

B+

A+

B+

8

영국의 토니 블레어(1953-)

1997-2007

제3의 길=노동+중산층, 3대혁명(교육·의료·복지)

<제3의 사회민주주의자>

Ao

A+

Ao

B+

9

한국의 김대중(1924-2009)

1998-2003

DJP 연대, IMF 체제 극복, 복지국가 초석

<노벨평화상 수상자>

A+

A+

A+

A+

10

브라질의 룰라(1945-)

2003-2010,

2023-현재

노동운동을 통한 군정 종식, 분배를 통한 성장

<노동자 출신 대통령>

A+

A+

A+

B+

11

(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1954-)

2005-2021

대연정=보수+진보, 경제성장, 난민 포용

<진정한 지도자(The Leader)>

A+

S

A+

A+

12

호주의 케빈 러드(1957-)

2007-2010,

2013

원주민 탄압 사과, G20 출범 주도

<성공과 실패의 타산지석>

Ao

B+

A+

Ao

13

멕시코의 오브라도르(1953-)

2018-2024

제4의 변혁: 혼합경제, 원주민 학대 사과

<시민운동가 출신 대통령>

A+

B+

A+

B+

G20

외 7개국가

 

14

스웨덴의 한손(1885-1946)

1936-1946

계급협력 복지: 국민의 집, 국민통합정부

<현대 스웨덴의 아버지>

A+

Ao

B+

Ao

15

베트남의 호찌민(1890-1969)

1945-1969

공화주의 혁명, 항불 독립운동, 통일베트남 초석

<현대 베트남의 아버지>

A+

Ao

B+

B+

16

체코의 하벨(1936-2011)

1993-2003

1989 벨벳혁명 주도, 좌우 타협과 관용

<유럽의 양심>

A+

A+

A+

B+

17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1929-2004)

1996-2004

투쟁과 평화: 소총+올리브 가지, 공존과 자치

<노벨평화상 수상자>

A+

Ao

B+

B+

18

(여)

라이베리아의 설리프(2006-2023)

2006-2018

내전 극복, 진실과 화해, 여성권리 강화

<노벨평화상 수상자>

A+

Ao

Ao

B+

19

(여)

칠레의 바첼레트(1951-)

2006-2010,

2014-2018

기억과 인권, 경제성장, 남녀동수 내각

<칠레의 어머니>

A+

A+

A+

Ao

20

(여)

뉴질랜드의 아던(1980-)

2017-2023

마오리족 화해, 아동빈곤 퇴치, 최저임금 인상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총리>

Ao

Ao

B+

B+

<표> 통합정치를 실천한 세계의 리더 20인 : 주요 업적 및 정치리더십 덕목

* 구분의 각각 순서는 정부수반의 재임연도 순임.

 

흔히 이기심과 거짓으로 얻은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사람이 아무리 영악하더라고 하늘과 타인을 끝내 속일 수는 없다고도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위 <표>에 나오는 세계의 리더 20인은 적어도 이타심과 진실한 행위로 정치지도자가 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소한의 명예와 자존을 지키는 길임을 알았거나, 역설적으로 가장 이기적으로 사는 길임을 깨달았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들 가운데 진실, 용기, 관용, 통찰이라는 네 덕목에서 각각 가장 두드러진 정치지도자는 네루, 메르켈, 만델라, 미테랑으로 파악된다. 또한 정치적 덕목 전체를 종합해 보면 가장 뛰어난 인물은 메르켈이고, 그 다음은 김대중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두 정치지도자의 통합적 리더십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통합정치가 거의 실종된 오늘의 풍조 속에서 나름의 관조와 성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김종필.webp

 

통합정치를 실천한 리더의 첫 번째 사례 :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1924∼2009, 재임 1998∼2003)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으로 미증유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도입으로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또한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화해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통합정치의 진수를 보여준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의 통합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삶과 정치 여정이 놓여 있던 시대적 맥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저항, 변화의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시련과 극복의 여정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 시대적 과제가 민주화에서 복지국가로 이행됨에 따라 그 이전의 평가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통령 이전의 김대중을 상징하는 말이 인동초(忍冬草)였다면, 이에 대통령 재임시의 김대중은 통합정치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김대중은 199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했다. 그가 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통해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한국전쟁 이래 지속되어 온 남북대결을 남북화해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통치 방식으로 통합정부를 선택했다. 내각은 DJP연합을 성사시킨 ‘야권 후보단일화 합의’에 따라 국무총리에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를 지명하고, 17개 부처 장관에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몫 8인, 자민련 몫 7인, 교수 1인, 김영삼 정부 유임 장관 1인등으로 구성했다. 이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양당 간에 이루어진 연립정부였지만, 여소야대의 의회지형으로 인해 과반에 미달하는 소연정(minority coalition)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이러한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다정파(多政派) 간 통합정치를 정면으로 시도했다. 즉 다양한 정파의 인물을 골고루 발탁한 것이다. 당선인 시절부터 비서실장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던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자금 20억원을 김대중에게 전달한 인연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국민회의 몫으로 입각한 강인덕 통일부 장관은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대표적인 강경 보수적 인물이었으며,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았던 이종찬 국가안전기획부장은 한때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이었고, 이기호 노동부 장관,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 정해주 국무조정실장 등은 관료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이 같은 인사는 당면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동시에 심려원모한 용인술이었다. IMF관리체제라는 혹독한 현실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고, 경색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조금이나마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새 정부에 가장 절실했던 것은 국민적 신뢰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국정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보다는 국정 경험이 풍부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이러한 ‘역설의 미학’을 간파했고, 현실 세계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실용주의를 몸소 겪고 체득한 정치인이었기에, 마치 오랜 국정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국정을 용의주도하고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그는 위기 극복에 적임자였고, 잘 준비된 리더였다.

 

김대중은 정적에 대한 관용과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통합정치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그는 대통령 당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사면복권을 건의했고, 이후 이들을 여러 차례 청와대에 초청해 식사를 하면서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역사적 타협과 화해를 위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대통령 퇴임 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방문해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고 하자, 그는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국민화합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고 격려했다.

 

물론 김대중이 언제나 통합의 경로 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일탈하기도 했고, 때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시중의 여론이나 야당의 비판을 경청하거나 이를 설득하는 데 정치적 여유를 갖지 못한 순간도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제도적·형태적 제약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사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정치나 정경유착과 거리를 두었고, 위선과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 현실 속에서도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하지 않았다. 특히 3김 정치의 주역인 김영삼과 김종필에 대해서는 인간적 예의와 정치적 신의를 지키려 했던 낭만과 관조를 아는 인물이었다.

 

필자는 국민의 정부 초기 은사이신 최장집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추천으로 3년간 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점에서 김대중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일종의 ‘존재피구속성’(存在被拘束性)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우회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뚝선 거봉인 손병희(1861∼1922)와 여운형(1882∼1947)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본다. 손병희는 봉건적 유제와 일제 지배 하에서 3·1운동을 통해 민중(people)을 역사의 주체로 전면 등장시켰던 인물이다. 또한 여운형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 민족단결을 도모하고,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통합정치를 모색하다가 산화했던 인물이다. 김대중 역시 이러한 민중적이고 통합적인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로 김대중은 “국민에 발맞추어 반걸음만 앞서 간” 용기 있는 리더였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준” 진실한 영웅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러한 평가보다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정치 여정을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만사가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1623)에 빗대어 본다면, 정치지도자의 마지막 관문인 권력승계를 무사히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는 “정치를 정말로 좋아한 사람”이라는 필자의 평가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메르켈 2-1.jpeg

 

 통합정치를 실천한 리더의 두 번째 사례 : 앙겔라 메르켈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1954∼, 재임 2005∼2021)는 여러 이력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여성 정치인이다. 그녀는 16년간 네 차례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경제적 침체와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사회통합과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굳건히 함으로써 독일을 선도적인 ‘강건한 국가’(strong state)로 만들었다. 통합적 리더십의 아이콘이라는 평가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유다.

 

메르켈이라는 정치인을 처음 접할 때 종종 의아해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공산독재 체제인 동독에서 35년간 목사의 딸이자 과학자로 살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아주 젊은 51세의 여성이 어떻게 유럽 최대 강국인 독일의 총리가 되었으며, 어떻게 그 자리를 16년간 지킬 수 있었는가일 것이다. 그녀는 자유에 대한 희구로 물결을 거슬러 자신의 길을 갔고, 겸손과 대연정(Große Koalition)을 통해 독일을 수많은 국가들의 롤모델(role model)로 만들었으며, 관용과 통찰로 통합적 리더십의 향기를 남긴 정치지도자였다.

 

메르켈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정치적 자유가 만개되자 동독에서 기독교 계열의 중도우파 시민정당으로 결성된 ‘민주주의 각성’(이하 DA)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들어섰다. 이듬해 직장인 물리화학연구소를 그만두고 당 대변인을 맡은 것이 본격적인 발걸음이 되었다. 그녀의 정치 입문은 갑작스럽고 운명적인 우연처럼 보였겠지만,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교의 대선배인 괴테가희곡 <파우스트>(Faust, 1832)에서 말한 “자유는 날마다 새로이 그것을 쟁취해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교훈을 따른 결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르켈의 정치 이력은 승승장구였다. DA가 독일기독교민주연합(이하 CDU)과 합당함에 따라 그녀는 통일 후 첫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헬무트 콜 총리(1930∼2017)에 의해여성청소년부와 환경부의 장관을 지냈다. 이러한 여세에 힘입어 CDU의 사무총장과 대표를 맡았고, 마침내 2005년 총선에서 CDU의 승리를 이끌어 CDU/CSU(바이에른의 기독교사회연합)와 독일사회민주당(이하 SPD) 간의 연립정부를 구성해 총리에 취임했다. 이처럼 이 모든 과정이 행운의 연속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확고한 권력의지와 불굴의 권력투쟁이 있었다. 그녀는 “권력의 반대말은 무력함(machtlos)이다”라는 사실을 동독에서 생활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당내 보수파인 ‘콜의 황태자들’을 제압해 나간 과정은 발퀴레<Walküre,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1874)에 나오는 여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메르켈의 연정은 그동안 통상적으로 운영해 왔던 연정과는 판이했다. 제1연합(CDU/CSU, 226석)과 제2당(SPD, 222석)이 결합한 대연정이었고,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72.9%)를 바탕으로 한 대연정이었다. 1966년이래 39년 만에 대연정을 채택하게 된 배경에는 막대한 통일비용의 지출에 따른 후유증과 고용없는 성장에 빠진 유럽의 병자인 독일을 치유하고 활력이 넘치는 ‘성장의 엔진’으로 만들겠다는 소명의식과 책임감이 있었다. 그 선택은 적중했고, 메르켈노믹스(Merkelnomics)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는 연평균 2∼3%를 기록했다. 특히 집권 직전 12.3%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일자리가 사회복지다”라는 모토 하에 집권 2기 말(2013)에는 5.2%로, 3기 말(2017)에는 3.4%로 떨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연정 파트너인 SPD와의 허심탄회한 공조와 노사 간의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낸 그녀의 통합정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메르켈의 업적 가운데 독일을 소프트 파워의 강국으로 만든 대표적 분야는 환경정책과 난민정책이 아닌가 본다. 그녀는 ‘환경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어느 지도자보다 탈원전과 기후변화 대응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과학적 차원의 문제제기와 사회적 합의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포용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과학적 지식과 미래에 대한 안목에 바탕을 둔 그녀의 환경정책은 지구촌과 세계인이 독일을 존중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국가로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메르켈의 난민정책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독일을 가장 빛나게 하고 강건한 국가로 만든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1년부터 시작된 중동 및 아프리카 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유럽 각국은 각자도생하는 형국이 되었고, 이는 유럽연합(EU)의 결속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메르켈은 2015년 8월 26일 드레스덴의 난민 캠프를 방문해 난민 수용을 확대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국민들에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Wir schaffen das)라고 호소했다. 이 선택은 자신의 신념 윤리 중 하나인 인도주의에 따른 것일뿐만 아니라 과거 유대인에 대한 ‘쇼와’(Shoah, 대재앙)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인류와 이웃을 위한 용기를 내자고 국민들을 설득했고, 이에 국민들은 호응했다. 그 결과 독일인에게 더 많은 자부심과 행복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필자는 메르켈을 영웅(Held)이라고 표하고 싶다. 다행스럽게 여성 영웅을 뜻하는 ‘헬딘’(Heldin)이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진실, 용기, 관용, 통찰이라는 덕목을 지니고 통합정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분명 헬딘이다. 그렇지만 헬딘이란 명칭은 그녀가 앞에서 다룬 세계의 리더 20인 가운데 ‘존엄’(würde)이라는 추가적인 덕목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존경과 찬사를 충분히 담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점에서 그녀의 롤모델인 러시아의 여제(女帝) 예카테리나 2세를 CatherinetheGreat(캐서린 대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녀를 MerkeltheGreat(위대한 메르켈) 내지TheLeaderMerkel(진정한 지도자 메르켈)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통합정치를 실천한 메르켈을 한 번쯤 다시 소환해 보는 것도 동시대인으로서 나름 의미가 있다면, 그녀가 자서전 <자유: 1954년∼2021년의 회상>(2024)의 맨 마지막에 남긴 귀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자유에는 민주주의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없이는 자유도 법치도 인권도 없다. 자유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안으로든 밖으로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각자는 각자를 위해,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해, 혼자만을 위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자유란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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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재일 교수는 한국정치와 정당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치학자이다. 대전고를 나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30여년간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국회도서관장, 대전세종연구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정치학회 부회장,한국정당학회장, 한국지방정치학회장을 지냈다. 아울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국회의장자문위원회 부위원장,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국정운영에 대한 실무경험도 쌓았다. 현재 사회공헌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며, 최근에 발간한 대표 저서로『통합정치와 리더십』(2024, 운주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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