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학 유재일 교수, 링컨 대통령으로 보는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행위자들의 소명..
〔주간 연재 시리즈〕 통합정치와 리더십 2회
- 정치의 본령과 통합정치의 요건 -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영화 「링컨」
필자는 매년 대학에서 「정치리더십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며, 2주차 수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1946~)의 영화 「링컨」을 수강생들과 함께 감상했다. 2013년 개봉할 때부터 감상 후에 진행되는 토론에 대한 코멘트를 준비하기 위해 매번 메모를 했기 때문에 영화 대사들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 어느 때는 이 영화를 포함해 세 차례의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다니엘 데이-루이스(1957~)의 실감나는 연기 때문에, 영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809~1865)의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영화는 링컨이 1861년 발발한 남북전쟁의 와중에 치러진 1864년 11월 8일 화요일 대선에서 대통령에 재선된 직후부터 이듬해 4월 15일 암살로 서거할 때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이 시기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담은 ‘수정헌법 제13조’를 관철시켜 나가기 위해 고심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기성정치에 대해 용의주도한 정치력으로 돌파해 나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링컨은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는 남부 11개 주의 연방 탈퇴로 국가가 분열되고 연방정부가 붕괴되고 있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결행했다. 전체 군인 사망자가 76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참화 속에서도, 그는 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는 일부 여론과 의회를 설득하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갈등 형태인 전쟁을 통해 분열된 국가의 재통합을 이뤄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에 주저하는 의원들을 혼신을 다해 설득하고, 실정법과 관행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정치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수정헌법안을 관철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모든 것에 있어서의 평등 대신에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차선책과 타협했다. 수정헌법안이 통과된 직후 공화당의 급진파인 테디어스 스티븐스 하원의원(1792~1868)이 흑인 아내에게 “부패로 통과되고,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추진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입법”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정치의 본령(本領, essence)에 대해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정치의 본령이란 시대적 가치와 과제라는 공공선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행위자(political actor)는 열정과 사려깊음, 또는 용기와 통찰이라는 미덕인 비르투스(Virtus)로 무장하고 운명의 신인 포르투나(Fortuna)와 맞서야 한다. 나아가 운명을 극복했더라도,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조언대로 정치적 성과가 역전되지 않도록 반드시 제도화인 오르디니(Ordini)를 관철시켜야 한다.
링컨은 이 같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투쟁과 전쟁도 불사하는 한편, 차선과 타협하며 한 걸음을 내딛기보다는 반걸음을 선택했다. 바로 이러한 선택이 통합정치의 요체가 아닌가 본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사람들이 정치공동체나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 중 가장 큰 쟁점은 누가 결정(decision)하고, 어떻게 통치(governance)할 것인가 하는 폴리티(polity)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는 정치공동체 내의 갈등과 통합과 밀접히 관련된 문제영역으로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역사와 현실의 관찰을 통해 도출된 공화주의는 세 가지 원리를 축으로 한다. ① 군주나 국가통치자의 폭정이 없는 통치체제, ② 통치자 및 통치기관 상호 간의 권력분립, ③ 통치자 및 대표자들의 선출과 그들에 대한 감독 등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역시 세 가지 핵심 축을 가진다. ① 정치공동체의 의사결정에서 모든 구성원의 직접 참여, ② 통치자 및 대표자의 선출과 그들에 의한 대의기능 수행, ③ 다수결주의의 원칙과 소수 의견의 존중 등이다. 이러한 개념 하나하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위대한 헌신 위에서 구축된 자산이다.
정치체제를 뜻하는 폴리티는 주권의 소재와 행사방법의 조합에 따라 네 가지 유형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군주제와 과두정의 조합인 ‘군주전제정’, 공화제와 과두정의 조합인 ‘과두독재정’, 공화제와 민주정의 조합인 ‘민주공화정’, 그리고 군주제와 민주정의 조합인 요·순의 성인정치나 플라톤(B.C. 427~347)의 철인정치와 같은 이른바 ‘유토피아정’이 있다.
이 중 민주공화정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상호 보완과 균형을 이루면서, 정치공동체의 안녕과 구성원 개인들의 행복을 실현해 온 것으로 받아들어진다. 하지만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친화적 면모보다는 길항적 면모가 두드러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공화제 국가에서 새로운 형태의 폭정이나 신권위주의체제가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공화주의의 혁혁한 역사를 지닌 러시아, 중국, 멕시코, 튀르키예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민주정 국가에서 모든 구성원의 참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거나 대표체제가 왜곡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미국,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인도 등에서 극우가 세를 넓히고 있는 현상은 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공화주의는 왜곡된 민주정에 의해, 역으로 민주주의는 변형된 공화제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분열과 정치갈등은 필연적으로 양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친화적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데는 분명한 패턴이 있다. 최고통치자가 법치보다는 인치(人治)에 기울거나 특정 집단이나 정당이 배타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 체제는 균열된다. 이 점에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2인3각’(二人三脚)이 되어 정치공동체의 편안함(comfort)과 발전을 위한 핵심적 기제로서 역할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마치 범선이 민심 또는 민의라는 바람과 물결에 의해 항해할 때, 배의 방향과 속도를 잡아주는 쌍돛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쌍돛대가 구비되어 있다고 해서 항해가 저절로 순항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배를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구성원들의 주인의식, 정치제도의 효과적 운영, 정치지도자의 유능한 리더십 등에 기반한 통합정치이다.
새삼스럽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가장 위협이 되는 통치형태인 폭정(despotism)과 인치(rule of man)에 대해 간략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폭정은 최고권력자와 집권세력이 공직에 부여된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남용하고,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행사나 폭력적 위협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이른다. 인치는 법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최고권력자와 집권세력이 권력을 법에 따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이른다.
대체로 폭정과 인치는 권위주의체제에서 공공연한 통치방식이지만, 헌정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체제에서는 수사적 개념으로 소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찍이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공자(B.C. 551~479)와 플라톤은 덕치나 철인정치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인치를 옹호했지만, <법경>FL(法經)을 쓴 이회(B.C. 455~395)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인치를 반대하고 법치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정치행위자들의 소명
정치과정에는 수많은 정치행위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추구하는 이익과 수행하는 기능의 유사성에 따라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그림>과 같이 국가(state),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 민간사회(civil society) 등이다. 국가는 대외적으로는 주권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안보와 번영과 같은 공공선을 구현하는 행위자로서, 공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다. 정치사회는 국가권력을 담당하거나 정치권력을 위해 경쟁하는 행위자로서, 사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다. 민간사회는 사적 이익이나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자로서, 사적 이익과 물질적 이익 내지 비물질적 이익을 추구한다.
<그림> 정치구조와 정치행위자

이들 세 정치행위자는 국제체제, 남북한 관계, 사회경제적 구조, 정치문화라는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정치구조 내에서 활동한다.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가 부처님 손바닥에서 재주를 피우는 것처럼, 이들은 정치구조 내에서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고유한 이익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위 행위자들 간에도 다층적인 상호작용이 이뤄진다. 여기서 바로 정치행위가 발생하고, 말 그대로 정치가 이뤄진다.
이들은 가치와 이익을 둘러싸고 반목과 갈등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을 통해 협력하고 타협하며 상생의 길을 모색하면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공공선을 만들어낸다. 즉 당면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아가 시대적 가치와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정치행위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막스 베버(1864∼1920)가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1919)에서 강조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포함한 소명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부처님 손바닥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손오공이 첫 번째 주인공인 것처럼, 정치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행위자는 국정책임자인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역할과 리더십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안위와 구성원의 행복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의 행동방식은 다른 정치행위자들의 인식과 행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통합정치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국정책임자는 어떤 모습일까? ????논어』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북극성 군주형’이나 ?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판교 전투의 ‘단기필마 장수형’보다는 다음과 같은 ‘오케스트라 지휘자형’이 아닌가 본다. 이 유형은 세계적 명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국정을 수행할 때 우선적으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뿐만 아니라 야당, 언론, 지식인 등의 비판을 경청한다. 그리고 국정을 협치와 조화로 운영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지휘한다.
여담이지만, 요즘 정치행위자들의 소명을 운명론이나 견유주의(犬儒主義)로 치부하는 정서가 짙어지고 있다.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에 성찰하고 관조하면서 희망과 의지를 실천해 나간다. 따라서 신의 섭리가 있다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다. 신은 사람의 선과 그것의 결핍인 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의 이치를 다소나마 이해한다면, 권력을 잃거나 얻은 것에 너무 비분강개하거나 환호작약할필요는 없다.권력은 잃은 자가 권토중래(捲土重來)하거나 얻은 자가 무신불립(無信不立)하면,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상 사람의 절반이 여성인데, 정치행위자로서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다룰 것이다. 사실 많은 여성 정치행위자들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나비의 날개짓을 하기도 하고, 자신만 타오르고 재가 될지라도 한 시대의 불꽃이 되기를 선택했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멀리서 반짝이는 별이 되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들의 꿈과 헌신이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태풍으로,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의 성화(聖火)로, 삼라만상의 조화를 주재하는 자미성처럼 우뚝 서리라고 생각한다.
필자 유재일 교수는 한국정치와 정당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중견 정치학자이다. 대전 출생으로 대전고를 나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30여년간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국회도서관장, 대전세종연구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정치학회 부회장,한국정당학회장, 한국지방정치학회장을 지냈다. 아울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국회의장자문위원회 부위원장,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 문위원 등을 맡아 국정운영에 대한 실무경험도 쌓았다. 현재 사회공헌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며, 최근에 발간한 대표 저서로 『통합정치와 리더십』(2024, 운주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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