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키워드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상규 칼럼 27] 당신은 요즘 무엇을 관찰하고 있는가?

  • 이상규 교수 기자
  • 입력 2026.09.30 15:06
  • 글자크기설정

대구역 1-1.jpg


사물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은 새로운 창조의 출발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유명한 수채화가 이경희 선생님에게 미술을 배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의 미술 수업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반은 장난 같았고, 반은 엉뚱해 보였지만, 그 수업에서 배운 ‘사물을 바라보는 법’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느 날 미술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화선지를 열두 칸으로 나누라고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대구역에 가서 옛 대구역사의 모습을 기억해 온 뒤, 그 모습을 한 칸에 그려 넣으라고 했다.


교실은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수업시간에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해방감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대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농땡이를 피우던 친구들은 학교 근처 라면집으로 몰려가 담배를 피우며 두 시간을 보내고 교실로 돌아왔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 우리는 서둘러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다음 미술 시간이 기다려졌다. 선생님이 지난 시간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그림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한 친구에게 “앞으로 나와”라고 했다. 그리고 대구역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 그 옆 칸에는 그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그려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한 친구가 타다 남은 담배꽁초를 그려 넣었다. 선생님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그 친구에게 말했다.


“너 이번 미술 성적은 100점이다.”


우리는 모두 의아했다. 그 친구는 사실 대구역에 가지도 않고 학교 근처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낸 친구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그 그림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그 친구를 앞으로 불러내어 교실 창가에 세워 놓고 한동안 자신의 옷에 남은 얼룩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그 얼룩의 무늬를 그림으로 옮겨 보라고 했다.


황당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추상화를 가르치는 선생님만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오래 바라본 뒤 관찰자의 감각과 기억 속에서 다시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


그때 선생님이 자주 하시던 말이 있다.


“돌멩이 하나라도 주의 깊게 들여다봐라. 그림 한 점 앞에서 세 시간은 머물러라.”


미술전시를 보고 오라는 과제도 자주 내주셨다. 그림을 대충 보고 감상문 몇 줄을 쓰라는 것이 아니었다.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면서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처음 보았을 때와 한참 뒤에 보이는 것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관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새가 우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눈과 귀와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그때는 그것이 미술교육의 특별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톰 워커의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이경희 선생님의 수업을 떠올렸다.


이 책에는 조르주 페렉, 마르셀 뒤샹,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 세상에 남다른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였던 예술가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이들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물과 풍경을 낯설게 바라본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붙잡고 오래 바라본다.


조르주 페렉은 파리의 한 광장에 앉아 우편배달 차량과 지나가는 사람, 개, 건물의 글자와 같은 사소한 일상의 장면을 끊임없이 기록했다. 우리가 보통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오히려 일상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역시 물 한 잔을 마시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거나 쌀알을 하나씩 세는 것처럼, 평범한 행위를 극단적으로 느리게 만들어 자신의 주의를 한 대상에 집중시킨다. 겉으로 보면 하찮은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흩어지는 주의를 다시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이 들어 있다.


돌이켜보면 이경희 선생님의 미술교육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대구역을 그리라고 했던 것은 단순히 건물을 정확하게 그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서 무엇이 가장 강하게 남았는지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담배꽁초를 그린 친구에게 높은 점수를 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가 대구역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을 포착했다는 점이었다.

 

대구역 2-1.jpg

 

얼룩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얼룩을 ‘얼룩’으로 그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 바라보면 얼룩도 하나의 형태가 되고, 형태는 다시 선과 면과 공간이 된다. 사물의 이름을 지우고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면 평범한 대상도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한다.


결국 창작은 없는 것을 무에서 만들어내는 일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익숙한 풍경은 눈앞에 있어도 배경으로 밀려난다. 매일 듣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는 소음이 되어 사라진다. 익숙함이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의 첫 단계는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주의 깊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와 부분을 번갈아 보고, 위와 아래를 달리 보고, 같은 장소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바라보면 동일한 사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래 바라볼수록 사물은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기억과 감각과 언어가 겹쳐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런 관찰은 예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학문 역시 관찰에서 출발한다. 연구자는 남들이 지나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한다. 새로운 발견은 때로 거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보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은 사실에서 시작된다.


특히 오늘날처럼 청소년들의 주의력이 수많은 영상과 정보 속에서 끊임없이 분산되는 시대에는 이런 ‘주의 깊게 보기’의 교육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빠르게 소비하는 능력보다 하나의 사물을 오래 바라보고, 듣고, 기억하고, 자기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능력이 창의성의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1-1.jpg

 

돌이켜보면, 이경희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림 그리는 법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쳤다.


돌멩이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그림 한 점 앞에 세 시간 머물며,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가르침은 어쩌면 미술을 넘어선 삶의 공부였다.


새로운 창조는 멀리 있는 특별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사물 하나, 무심히 듣고 흘려보내는 소리 하나,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던 얼룩 하나를 다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일이며, 세상을 새롭게 보는 순간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글=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국립국어원장-한국국어정책학회장-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이상규 국어학자.jpg

추천뉴스

  • [굿리더뉴스] 서울시내 골목골목으로 몰려드는 해외 관광객
  • [굿리더뉴스] 세계 물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한국의 과학자..
  • [굿리더뉴스] 한미동맹, 정보공유 문제 없나?
  • [굿리더뉴스] 백악관 대변인은 반드시 우파 금발의 미인이어야 한다!?
  • [굿리더뉴스] 주춤하던 광주 반도체, SK 최태원이 다시 속도 낸다..
  • [굿리더뉴스] 국힘 6선 조경태 의원이 갑자기 노무현 묘역을 참배한 까닭은?
  • [무주=남상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전북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
  • [굿리더뉴스] 여권 강경파에게 던지는 이대통령의 초고강도의 레드카드..
  • [굿리더뉴스] '벌거벗은 트럼프', 유럽의회에 등장하다..
  • [굿리더뉴스] 손흥민, 차범근을 뛰어넘었다..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이상규 칼럼 27] 당신은 요즘 무엇을 관찰하고 있는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